함의 타락행위(墮落行爲)로 말미암아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시려는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노아가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를 다시 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Due to Ham’s fallen act,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in Noah’s family was not fulfilled. Nevertheless, God had absolutely predestined that the purpose of creation would one day be realized. Therefore, upon the foundation of Noah’s heart of loyalty toward Heaven, God called Abraham and commenced a new chapter in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with his family.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노아가정이 이루려다 못 이루었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여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아야만 하였다. 따라서 아브라함도 먼저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고 그 기대 위에서 ‘실체기대’를 탕 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Abraham’s family was to restore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which Noah’s family had left incomplete, and receive the Messiah upon that foundation. Thus, as Noah before him, Abraham had to restore through indemnity the foundation of faith, and his sons had to restore through indemnity the foundation of substance.
Ⅰ. 믿음의 기대
3.1 The Foundation of Faith
3.1.1 The Central Figure for the Foundation of Faith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中心人物)은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노아를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뜻을 계승하여 이루기 위한 중심인물로 세워졌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노아의 노정을 위하여 세워졌다가 함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게 되었던 모든 조건들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노아를 중심한 뜻을 계승할 수 없었던 것이다.
In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in Abraham’s family, the central figure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faith was Abraham. God chose Abraham to inherit the mission of fulfilling the Will which He had tried to fulfill with Noah. However, Abraham could not inherit this mission unless he first restored through indemnity all the conditions which had been given to Noah to fulfill, but which were lost to Satan due to Ham’s sin.
노아가 첫째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조건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0대와 심판 40일 기간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10대와 함께, 그 10대가 각각 심판 40수를 탕감복귀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1대를 40일 기간으로써는 탕감복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후일 모세노정에 있어서 정탐(偵探) 40일의 실수를 광야 표류 40년 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한 것과 같이(민 14 : 34), 여기에서도 각 대(代)가 심판 40일의 실수를 40년 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하는 통산년수(通算年數)를 세우게 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로부터 10대에 걸친 400년 탕감기간을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노아 대신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다. 이와 같이,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1600년 간에 10대를 복귀하였던 시대에서 400년 간에 10대를 복귀하는 시대로 넘어왔기 때문에 노아 이후 인간의 수명(壽命)은 갑자기 짧아지게 되었다.
The first conditions which Noah’s family lost to Satan were the ten generations from Adam to Noah and the forty-day period of judgment. Therefore, Abraham had to restore through indemnity another ten generations. Each of these ten generations was to restore the number forty, which represented the flood judgment. Once the forty-day flood ended in failure, the restoration of each generation had to span its entire length; this could not be accomplished in only forty days. The providence to restore the flood in each of those ten generations had to take a longer period of time: forty years. This is similar to the situation in Moses’ time, when restoration of the failed forty-day spying mission required the people to wander in the wilderness for forty years (Num. 14:34). Therefore, after an indemnity period of ten generations and four hundred years had passed since Noah, God chose Abraham to inherit Noah’s mission. Like this, because the age was shifted to the stage restored ten generations during four hundred years from the stage restored ten generations during sixteen hundred years from Adam to Noah, the span of life has been shorted suddenly since Noah.
노아가 둘째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조건은 믿음의 조상의 입장과 아벨 대신이었던 함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과 함의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고는 노아의 입장에 설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노아 대신 믿음의 조상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노아가 믿음과 충성으로 방주(方舟)를 지었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믿음과 충성으로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드려야만 했었다. 한편 또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벨의 대신이었던 함(그들은 모두 둘째 아들로서 실체헌제의 중심이었다)을 사탄에게 내주셨으므로, 탕감복귀원칙에 의하여 하나님도 그 대신으로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입장에 있는 존재를 빼앗아 오셔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상(偶像) 장사인 데라로부터 그 아들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셨던 것이다(수 24 : 2∼3).
The next set of conditions which Noah’s family lost to Satan was the position of the father of faith and the position of Ham, who was to take up the role of Abel. Therefore, Abraham could not stand in Noah’s position without first restoring through indemnity the roles of the father of faith and of Ham. To assume the role of the father of faith in place of Noah, Abraham had to make a symbolic offering in faith with a loyal heart, just as Noah did when he built the ark. Next, how could Abraham restore the position of Ham? Ham was to have represented Abel, the most beloved of God: both were second sons and chosen to be the central figures of the substantial offering. Since Satan claimed Ham,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restoration through indemnity, God needed to claim someone whom Satan loved most. This is the reason God called Abraham, who was the firstborn son of Terah, an idolator (Josh. 24:2-3).
아브라함은 노아의 대신이요 따라서 아담의 대신이기 때문에 복귀(復歸)한 아담형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노아에게 축복(祝福)하셨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에게도 자녀를 번식하여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라고 축복하셨던 것이다(창 12 : 2). 아브라함은 이러한 축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하란에서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내 사라와 조카 롯 그리고 거기에서 취한 모든 재물과 사람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갔었다(창 12 : 4∼5).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노정으로써, 장차 야곱과 모세가 사탄세계인 하란과 애급(埃及)에서 각각 그 처자(妻子)를 데리고 재물을 취하여, 그 어려운 환경을 박차고 떠나 가나안으로 복귀해야 할 전형노정(典型路程)으로 삼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노정은 또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사탄세계의 모든 인간과 만물세계를 하나님의 세계에로 복귀해야 할 전형노정을 예시(豫示)한 것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후편 제2장 제1절 Ⅱ 참조).
Abraham was to inherit the mission of Noah and thus the mission of Adam. In this capacity, he represented restored Adam. As God had blessed Adam and Noah, God also blessed Abraham: I will make of you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and make your name great, so that you will be a blessing.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and him who curses you I will curse; and by you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less themselves (Gen. 12:2-3). After receiving this blessing, in obedience to God’s command, Abraham left his father’s house in Haran and entered Canaan with his wife Sarah, his nephew Lot, and all his belongings and servants (Gen. 12:4-5). In this sense, God set Abraham’s course as the model course for restoring Canaan, which Jacob and Moses would walk in their days. Jacob and Moses would take their family members and all their belongings out of Haran and Egypt, respectively, and bring them back to Canaan while suffering many hardships along the way. Abraham’s course also foreshadowed the course which Jesus would one day walk: to take humanity and all things out of Satan’s world and bring them back to God’s world (cf. Moses and Jesus 1.2).
3.1.2 The Objects for the Condition Offered for the Foundation of Faith
3.1.2.1 Abraham’s Symbolic Offering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비둘기와 양과 암소로써 제사(祭祀)를 드릴 것을 명하셨던 것이니, 이것들은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條件物)들이었던 것이다(창 15 : 9). 따라서 마치 노아가 ‘상징헌제(象徵獻祭)’로서 방주(方舟)를 지어 바치려 하였을 때 그 헌제를 위한 믿음을 세웠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이 ‘상징헌제’를 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위한 믿음을 세워야만 했었다.
God commanded Abraham to offer a dove and a pigeon, a ram and a goat, and a heifer (Gen. 15:9). These were the objects for the condition which he offered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faith. But before he could make the symbolic offering, Abraham had to demonstrate right faith, just as Noah before him was accounted righteous prior to building the ark as his symbolic offering.
성서에는 노아가 어떠한 방법으로 그 믿음을 세웠는가 하는 것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가 당세의 의인(義人)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방주(方舟)를 지으라시는 명령을 받기에 합당한 의인이 되기까지에는 필시 어떠한 믿음을 세웠음에 틀림없다. 기실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와 같이 믿음에서 믿음을 세워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롬 1 : 17).
The Bible does not explain clearly how Noah demonstrated his faith. But from the verse, “Noah was a righteous man, blameless in his generation; Noah walked with God” (Gen. 6:9), we can deduce that Noah demonstrated faith before he was deemed worthy to receive God’s commandment to build the ark. In truth, those who walk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must continually strengthen their faith (Rom. 1:17).
Let us investigate how Abraham strengthened his faith in preparation for making the symbolic offering.
아브라함은 제2 인간 조상 노아의 입장을 복귀해야 했었다. 따라서 그는 또 아담의 입장에도 서야 했기 때문에, 그는 ‘상징헌제’를 하기 전에 아담가정의 입장을 복귀하는 상징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먼저 세워야 했던 것이다.
Since Noah was the second human ancestor, for Abraham to restore the position of Noah, he also had to assume Adam’s position. For this reason, he was required to make a symbolic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the position of Adam’s family before he could make the actual symbolic offering.
창세기 12장 10절 이하의 성구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기근(饑饉)으로 인하여 애급(埃及)으로 내려갔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애급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고자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그와 부부관계(夫婦關係)라고 하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미리 짠 바 계책대로 자기의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그의 처(妻) 사라를 남매(男妹)의 입장에서 바로의 아내로 빼앗겼다가 하나님이 바로를 징계하시어 다시 그 아내를 찾아오는 동시에, 데리고 갔던 조카 롯과 함께 많은 재물을 취해 가지고 나왔었다. 아브라함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서, 아담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이러한 섭리노정(攝理路程)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In this regard, the Bible gives an account of a trip Abraham made to Egypt because of a famine (Gen. 12:10-20). When they entered Egypt, Abraham instructed his wife Sarah to pose as his sister because he was afraid that the Pharaoh might desire her. Abraham feared that the Pharaoh would have him killed if he found out that he was Sarah’s husband. Indeed, at the Pharaoh’s command, Abraham handed Sarah over to him while she posed as his sister. Thereupon, God chastised the Pharaoh, Abraham took back his wife along with his nephew Lot and the abundant wealth which the Pharaoh had given him, and they left Egypt. Without knowing it, Abraham walked this providential course to make a symbolic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the position of Adam’s family.
아담과 해와가 미완성기(未完成期)에서 아직 남매와 같은 입장에 있었을 때에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빼앗아 감으로 인하여, 그의 자녀들과 만물세계까지 사탄의 주관하에 속하게 되었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우려면,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남매와 같은 입장에서 처 사라를 사탄의 실체인 바로에게 빼앗기었다가 그의 처의 입장에서 다시 그녀를 찾아옴과 동시에, 전인류(全人類)를 상징하는 롯과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재물을 찾아오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창 14 : 16). 아브라함의 이러한 노정은 후일에 예수님이 오셔서 걸어야 할 전형노정(典型路程)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탕감조건을 세운 후에야 비로소 비둘기와 양과 암소로써 ‘상징헌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When the Archangel took Eve – capturing under his dominion all of Eve’s descendants and the natural world – Adam and Eve were still brother and sister. For Abraham to make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this, he was deprived of Sarah, who was playing the role of his sister, by the Pharaoh, who represented Satan. He then had to take her back from the Pharaoh as his wife, together with Lot as the representative of all humanity, and wealth symbolizing the natural world. This course which Abraham walked was the model course for Jesus to walk in his day. Once he had fulfilled this indemnity condition, Abraham was deemed ready to make the symbolic offering.
그러면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는, 원래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려 하셨던 노아와 그 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담과 그 가정의 입장에도 서야 했었기 때문에, 아담가정에서 가인 아벨의 헌제를 중심하고 복귀하려 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조건물(條件物)을 바쳐야 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또 노아가정이 방주를 중심하고 복귀하려 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조건물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물로 바쳐야 했었다. 이러한 상징적인 조건물로 바친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상징제물이었던 것이다.
What was the significance of Abraham’s symbolic offering? For Abraham to become the father of faith, he had to restore through indemnity the position of Noah, whom God had intended to raise up as the father of faith, as well as Noah’s family. Furthermore, he had to restore the position of Adam and his family. Abraham was thus required to offer in an acceptable manner objects for the condition to restore all that Cain and Abel were supposed to accomplish through their sacrifices, and all that Noah’s family was trying to accomplish through the dispensation of the ark. Abraham’s symbolic offering consisted of objects with such symbolic meanings.
이 세 가지의 상징제물은 3단계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천주(天宙)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즉 그중의 비둘기는 소생(蘇生)을 상징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섭리(舊約攝理) 완성자, 곧 소생섭리(蘇生攝理) 완성자로 오셨었다. 즉 예수님은 비둘기로 표시된 소생섭리 완성자로 오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표징(表徵)으로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신(神)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임하셨던 것이다(마 3 : 16). 한편 또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를 복귀하려고 오신 분으로서 먼저 사탄이 침범했던 그 비둘기를 복귀한 입장에 서야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둘기로써 그가 소생 구약섭리 완성자로 오셨음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Abraham offered three types of objects as the condition for his symbolic offering: first, a dove and a pigeon; second, a ram and a goat; and third, a heifer. These three sacrifices symbolized the cosmos, which was completed through the three stages of the growing period. The dove represented the formation stage. When Jesus was baptized by John the Baptist at the Jordan River, the Spirit of God descended and alighted upon him in the form of a dove (Matt. 3:16). Moreover, there was a second reason for the vision of the dove alighting on Jesus. Jesus was to restore Abraham’s mistake in offering this dove, which, as we shall see, Satan snatched away.
다음으로 양(羊)은 장성(長成)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祭物) 실수를 복귀하려고 오신 분으로서, 비둘기로서 표시된 모든 것을 복귀한 구약섭리의 기대(基臺) 위에서 양으로서 표시된 모든 것을 복귀해야 할 장성 신약섭리(長成 新約攝理)의 출발자이기도 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의하여 비둘기로 표시된 소생섭리의 완성자라는 증거를 받으신 후, 어느 날 세례 요한은 또 예수님이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 : 29)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장성 사명 출발자이심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The ram represented the growth stage. Once Jesus had brought fulfillment to the Old Testament Age, thus restoring everything represented by the dove, he commenced the New Testament Age at the growth stage of the providence, when everything represented by the ram was to be restored. After John the Baptist testified that he had seen the Spirit descend on Jesus as a dove – meaning that Jesus was the one to complete the formation stage of the providence – he testified that Jesus would begin the growth stage mission, saying, “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s of the world!” (John 1:29).
다음으로 암소는 완성(完成)을 상징하였다. 사사기 14장 18절을 보면, 삼손이 수수께끼의 문제를 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로 하여금 삼손을 꼬여 그 내용을 탐지해 내게 함으로써 그것을 푼 일이 있었는데, 그때 삼손은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삼손은 아내를 암소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The heifer represented the completion stage. It is written that once, when Samson put forth a riddle to the Philistines, they obtained the answer by having Samson’s wife press him to reveal it. Samson said to them, “If you had not plowed with my heifer, you would not have found out my riddle” (Judg. 14:18), here metaphorically calling his wife a heifer.
예수님은 전인류의 신랑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가 재림(再臨)하실 때까지의 성도(聖徒)들은 오시는 신랑 앞에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부 된 성도들이 다시 오시는 신랑 된 예수님과 어린양잔치를 치른 후에는 신부가 아니고 아내가 되어 남편 된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재림 이후의 완성 성약시대(完成 成約時代)는 아내의 시대요, 따라서 암소의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암소는 곧 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많은 영통인(靈通人)들이 이때가 소의 시대라고 계시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Jesus came as the bridegroom to all humanity. All devout believers should become his brides, awaiting the time of his return. After these brides celebrate the marriage of the Lamb with Jesus, their bridegroom, they are to live in the Kingdom of Heaven in oneness with him as his wives (in a metaphorical sense). Therefore, the Completed Testament Age following the Second Advent of Jesus is the age of the heifer, or the age of the wife. The reason why some spiritual mediums have received the revelation that the present era is the age of a cow or heifer is because we are entering the completion stage.
그러면 이 3제물은 또 무엇을 탕감복귀하는 것인가? 이 3제물은 또 무엇을 탕감복귀하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그의 ‘상징헌제(象徵獻祭)’로써, 일찍이 아담과 노아의 각 가정을 중심한 섭리에서 그들이 ‘상징헌제’로써 탕감복귀하려다가 사탄에게 내주었던 모든 것을 재탕감복귀(再蕩減復歸)하는 동시에, 또 그들이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탕감복귀하려다가 실패하여 사탄에게 내주었던 모든 것을 재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는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렇게 3대에 걸친 종적인 섭리의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그 3제물로써 일시에 횡적으로 복귀하려는 것이었다.
What were the three sacrifices to indemnify? Abraham was to restore by this offering all that God could not restore through the symbolic offerings made by the families of Adam and Noah – offerings that were made properly but then forfeited to Satan due to subsequent failures. Abraham’s offering was also to make a symbolic indemnity condition as restitution for their failures in making the substantial offering. In other words, the purpose of Abraham’s symbolic offering of the three types of objects for the condition was to restore in his generation (horizontally) all the indemnity conditions which had accumulated in the course of the providence (vertically) through the three generations of Adam, Noah and Abraham.
그리고 또 소생(蘇生)·장성(長成)·완성(完成)의 3단계를 상징하는 비둘기와 양과 암소를 한 제단에 벌여 놓고 헌제한 것은, 마치 아담의 당대에서 3단계의 성장기간(成長期間)을 완성하려 했던 것과 같이 아담의 입장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소생 아담, 장성 노아, 완성 아브라함의, 뜻으로 본 3대에 걸쳐서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려던 종적인 섭리를 일시에 횡적으로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헌제는 사탄이 침범하였던 3수로 표시된 모든 조건들을 일시에 탕감복귀함으로써, 전복귀섭리(全復歸攝理)를 단번에 이루시려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Why did Abraham place the three sacrifices – the dove and pigeon, the ram and goat, and the heifer, symbolizing the formation, growth and completion stages – on one altar? Before the Fall, Adam was responsible to grow through all three stages in his one lifetime. Similarly, Abraham, now in the position of Adam, was supposed to restore, all at once, the long providence which God had conducted through the three providential generations of Adam (formation), Noah (growth) and Abraham (completion). Through one offering, he could restore all the defiled conditions containing the number three. The symbolism of Abraham’s sacrifice reveals God’s Will to fulfill the entire providence of restoration once and for all.
Now let us study how Abraham made the symbolic offering:
창세기 15장 10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다른 제물은 모두 둘로 쪼개서 제단의 좌우에 놓았으나 비둘기만은 쪼개지 않고 그대로 놓았기 때문에, 솔개가 그 고기 위에 내려왔으므로 아브라함이 이것을 쫓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 날 해질 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 15 : 13)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쪼개야 할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에 솔개가 내렸었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 들어가서 400년 간을 고역(苦役)하게 되었던 것이다.
He said to him, “Bring me a heifer three years old, a she-goat three years old, a ram three years old, a turtledove, and a young pigeon.” And he brought him all these, cut them in two, and laid each half over against the other; but he did not cut the birds in two. And when the birds of prey came down upon the carcasses, Abram drove them away. As the sun was going down, a deep sleep fell on Abram; and lo, a dread and great darkness fell upon him. Then the Lord said to Abram, “Know of a surety that your descendants will be sojourners in a land that is not theirs, and will be slaves there, and they will be oppressed for four hundred years” (Gen. 15:9-13). Because Abraham did not cut the dove and pigeon in two as he should have, birds of prey came down and defiled the sacrifices. As a result of his mistake, the Israelites were destined to enter Egypt and suffer hardships for four hundred years.
그러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 문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해결(未解決)의 문제로서 남아져 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원리(原理)를 통하여서만 명확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물을 쪼개야 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Why was it a sin not to cut the birds in half? This question can be understood only with the help of the Principle. Let us first investigate the reason why Abraham was instructed to cut the sacrifices in half.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은 선과 악을 분립하여 악을 멸하고 선을 세움으로써 선주 권(善主權)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한 존재를 가인과 아벨로 분립한 후에 헌제(獻祭)해야 했던 것이나, 또 노아 때에 홍수(洪水)로써 악을 치고 선을 분립했던 것 등의 목적은 모두 선주권을 복귀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제물을 쪼개 바치게 함으로써, 아담이나 노아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선악 분립의 상징역사(象徵役事)를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God’s work of salvation aims to restore the sovereignty of goodness by first dividing good from evil and then destroying evil and uplifting the good. This is the reason Adam had to be divided into Cain and Abel before the sacrifice could be made. This is the reason why in Noah’s day, God struck down evil through the flood judgment and winnowed out Noah’s family as the good. God had Abraham cut the sacrifices in two before offering them, with the intention of doing the symbolic work of dividing good from evil, which was left unaccomplished by Adam and Noah.
그러므로 제물을 쪼개는 것은, 첫째로 아담가정에 있어서 선악(善惡)의 모체(母體)인 아담을 선과 악의 두 표시체로 분립하기 위하여 아벨과 가인으로 갈라 세운 것과 같은 입장을 복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노아가 홍수 40일로써 선과 악을 갈라 세웠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함이었으며, 셋째로는 사탄 주관하(主管下)에 있는 피조세계(被造世界)에서 선주권(善主權)의 세계를 갈라 세우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넷째로는 사탄과의 혈연관계(血緣關係)를 통하여 들어온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聖別)하는 조건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The sacrifices were to be divided, first, to restore the situation in Adam’s family in which Abel and Cain were divided into a representative of good and a representative of evil. Second, it was to restore the situation of having divided good from evil during the forty days of Noah’s flood. Third, it was to make the symbolic condition to separate a realm of good sovereignty out of the universe ruled by Satan. Fourth, it was to make the condition to sanctify the offering by draining out the blood of death, which had entered fallen humanity when they were bound in blood-ties to Satan.
그러면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는가? 쪼개지 않은 것은 첫째로 가인과 아벨을 분립하지 않은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아벨적인 대상이 없었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헌제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가인 아벨의 헌제 실패는 탕감복귀(蕩減復歸)되지 않았다. 둘째로 그것은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의 홍수심판(洪水審判)에서 선악을 분립하지 못하였던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상대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선의 대상이 없게 되어 홍수심판에서 실패한 입장으로 되돌아간 결과가 되었다. 셋째로 그것은 사탄 주관하에 있는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이 상대하실 수 있는 선주권의 세계를 분립하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넷째로 그것은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聖別)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상대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성물(聖物)이 되지 못하였다.
Why was it a sin not to divide the offering? First, not dividing the offering has the significance of not dividing Abel from Cain. Without being divided, the offering could not be acceptable to God because it did not provide Him with an Abel-type object partner which He could take. Consequently, the mistakes Cain and Abel had made in their sacrifices were not restored. Second, not dividing the offering was tantamount to repeating the failure of the providence in Noah’s time, when good and evil remained undivided despite the flood. Like the failure of Noah’s family, Abraham’s failure to divide the offering also deprived God of His good object partner. Thus, it repeated the mistake which made the dispensation of the flood a failure. Third, not dividing the offering meant there was no symbolic condition to separate a realm of God’s good sovereignty out of the universe under Satan’s dominion. Fourth, because the blood of death was not drained out of it, not dividing the offering meant it could not be a sanctified offering acceptable to God.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고 바침으로 인하여 그것은 사탄 것 그대로를 바친 것이 되어, 결국 그것은 사탄의 소유물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준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In other words, when Abraham offered the birds without first dividing them, it meant that he offered what had not been wrested from Satan’s possession. His mistake had the effect of acknowledging Satan’s claim of possession over them.
이와 같이 소생(蘇生)을 상징하는 제물인 비둘기가 사탄의 소유물로 남아지게 되었으므로, 소생의 기대 위에 세워져야 할 장성(長成)과 완성(完成)을 상징하는 양과 암소에게도 역시 사탄이 침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상징제물(象徵祭物)은 모두 사탄에게 바친 결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범죄가 된 것이다.
The dove, symbolizing the formation stage, remained in Satan’s possession. Consequently, Satan also claimed the ram, symbolizing the growth stage, and the heifer, symbolizing the completion stage, both of which were to be fulfilled based upon the formation stage. Since it had the effect of handing over the entire symbolic offering to Satan, not dividing the birds constituted a sin.
Next, let us examine what is meant by the verse that birds of prey descended upon the carcasses.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뜻 앞에는 반드시 사탄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즉 창세기 4장 7절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헌제를 할 때에도 사탄이 그들을 엿보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노아 때에도 심판 직후에 사탄이 노아가정에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귀로써 보여 주셨다(창 8 : 7).
Since the Fall of the first human ancestors, Satan has always been stalking those with whom God worked to fulfill His Will. When Cain and Abel were making their sacrifices, Satan was couching at the door (Gen. 4:7). In the story of Noah, the raven circling about signifies how Satan was looking for an opportunity to invade Noah’s family right after the flood (Gen. 8:7).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할 때에도, 그 제물에 침범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사탄은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을 보고 곧 그 제물에 침범하였었다. 그리하여 성경은 이 사실을 솔개가 제물 위에 내린 것으로 표상(表象)하고 있는 것이다.
Similarly, when Abraham was making his symbolic offering, Satan was on the lookout for an opportunity to seize the sacrifice. He profaned it as soon as he saw that the birds were not divided. The Bible describes this by the image of birds of prey descending upon the sacrifice.
이러한 ‘상징헌제’의 실수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말미암아 그 ‘상징헌제’로써 탕감복귀하려던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결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異邦)인 애급에서 400년 간 고역(苦役)을 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Abraham’s mistake in making the symbolic offering caused the offering to be defiled. All the conditions God intended to restore through it were lost. As a consequence, Abraham’s descendants had to suffer oppression and slavery for four hundred years in the land of Egypt. Let us investigate the reason for this.
하나님은 노아 때에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셨던 10대와 심판 40수를 동시에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400년이란 사탄 분립기간을 세우시고, 그 분립기대(分立基臺) 위에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 제물을 또 사탄에게 바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상징헌제’로써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한 탕감기간(蕩減期間)이었던 노아 이후의 400년 기간도 역시 사탄에게 내주 시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기 전의 입장이며, 따라서 노아가 방주(方舟)를 짓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서는 이 400년이란 사탄 분립기간을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고역하는 400년 기간은, 노아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출발하려 했었던 그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여 모세를 그 터전 위에 세우시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고역기간(苦役期間)은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한 벌을 받는 기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를 위하여 사탄 분립의 터를 닦는 기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God called upon Abraham and commanded him to make the symbolic offering at the completion of a four-hundred-year period for the separation of Satan. This period had been set up to restore through indemnity the ten generations from Adam to Noah and the forty-day period of the flood judgment, lost to Satan due to Ham’s sin. It was also the indemnity period necessary to establish Abraham as the father of faith when he completed the symbolic offering. When Abraham’s mistake in the symbolic offering allowed Satan to claim the offering as his, that four-hundred-year period was also lost to Satan. To re-create on the national level the situation before Abraham’s failure in the symbolic offering, which was itself parallel to when Noah was called upon to build the ark, God set up another four-hundred-year period for the separation of Satan. During this period, the Israelites were slaves in Egypt. By enduring through this period, the Israelites were to restore – this time on the national level – the situations of Noah and Abraham at the outset of their missions as the fathers of faith, thereupon also laying the foundation for Moses to begin his mission. Hence, this period of slavery was both the time when the Israelites were being punished for Abraham’s mistake and the time when they were laying the foundation to cut off ties to Satan and commence God’s new providence.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한 제단에 3제물을 동시에 드리는 ‘상 징헌제’에 성공케 하심으로써 소생(蘇生)·장성(長成)·완성(完成)으로 표시된 모든 섭리를 동시에 이루려 하셨다는 것은 이 미 위에서 논술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를 중심한 섭리는 다시 이삭을 거쳐 야곱까지 3대에 걸친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패는 노아의 방주(方舟)를 중심한 ‘상징헌제’와 가인 아벨을 중심한 ‘상징헌제’ 등의 실패를 반복한 것이 되어 버렸다.
As explained earlier, God had hoped to fulfill, all at once, the dispensations in the formation, growth and completion stages by having Abraham successfully make the symbolic offering of three types of sacrifices on one altar. Contrary to this plan, Abraham failed, repeating the mistakes of the past. Consequently, the providence centered on him was prolonged through the three generations of Abraham, Isaac and Jacob.
3.1.2.2 Abraham’s Offering of Isaac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한 후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라고 명하시어(창 22 : 2), 그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하시려는 새로운 섭리를 하셨다. 예정론(豫定論)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뜻을 위하여 예정되었던 인물이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 장본인을 다시 세워 쓰실 수 없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헌제로써 찾아 세우려던 모든 뜻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다시 세우시어 이삭 헌제로써 그의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려는 섭리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인가?
After Abraham failed in the symbolic offering, God commanded him to sacrifice his only son Isaac as a burnt offering (Gen. 22:2). In this way, God began a new dispensation for the purpose of restoring through indemnity Abraham’s failure.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predestination, when someone whom God has foreordained to accomplish a certain portion of His Will fails to complete his responsibility, God does not use him a second time. Why, then, did God work with Abraham again when he had him offer Isaac?
첫째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1차였고,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으며,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3차였다. 그런데 3수는 완성수(후편 제3장 제2절 Ⅳ)이기 때문에,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섭리가 연장되기 제3차 만이었던 아브라함 때에는 이 섭리를 완성해야 할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실체로 헌제하여 보다 큰 것으로서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움으로써, ‘상징헌제’ 실수로 인하여 상징적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We can advance three reasons. First, the number three represents completion (cf. Periods 2.4). God’s Principle requires that when the providence to lay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takes place for the third time, it must be brought to completion. Therefore, God’s providence to lay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which began in Adam’s family as the first dispensation and continued in Noah’s family as the second dispensation, had to conclude in Abraham’s family, which was the third dispensation. For this reason, Abraham was given the opportunity to fulfill a condition of indemnity, albeit at a greater price, and thereby make symbolic restoration of all he had lost when he failed in the earlier symbolic offering. This greater indemnity condition was the offering of his son Isaac as a sacrifice.
둘째로는, 위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헌제를 드리는 아브라함의 입장은 곧 아담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사탄은 아담과 그의 자식 가인에게 침범함으로써 2대에 걸쳐 그들을 빼앗아 갔었기 때문에, 탕감복귀원칙(蕩減復歸原則)에 의하여 하늘편에서도 아브라함과 그 자식의 2대에 걸쳐서 빼앗아 올 수 있는 섭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Second, as was explained earlier, when Abraham was making his sacrifice, he was in the position of Adam. Satan had attacked both Adam and his son Cain, defiling the family over the course of two generations. Hence,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restoration through indemnity, God could work to take back Abraham and his son Isaac over the course of two generations.
셋째로, 아담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으나, 섭리적으로 보아 노아는 아담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서도 소생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한 아벨의 심정의 터 위에 있었기 때문에 방주(方舟)로써 직접 ‘상징헌제’를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소생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터전과 장성 ‘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의 기대 위에 부름받아 완성 ‘상징헌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렇듯 ‘상징헌제’에 실수하였지만, 하나님은 아벨이나 노아가 ‘상징헌제’에 성공한 역사적인 심정의 기대를 조건으로 그를 다시 세워 한 번 더 헌제를 하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Third, we learned that Noah could make the symbolic offering of the ark himself, even though he was in the same position as Adam who could not make the sacrifice directly. This is because he stood upon the merit of Abel, who had demonstrated a faithful heart when he succeeded in the symbolic offering. When Abraham was called by God, he stood on the merit of both Abel, who succeeded in the symbolic offering at the formation stage, and Noah, who succeeded in the symbolic offering at the growth stage. Upon this double foundation, Abraham was to make the symbolic offering at the completion stage. Accordingly, even though Abraham failed, God could raise him up and give him another chance to make an offering based on the accumulated merit of Abel’s and Noah’s faithful hearts.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에도 ‘상징헌제’를 하던 때와 같이 먼저 아담가정을 복귀하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이삭헌제를 위한 믿음을 세워야 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다시 자기의 처(妻) 사라와 남매(男妹)의 입장에 서 가지고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기어 일단 그의 처가 되어진 처지에서 다시 찾아오는 역사(役事)를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때에도 사라와 함께 인류를 상징하는 노비와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재물을 찾아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창 20 : 1∼16).
Before he could offer Isaac as a sacrifice, Abraham once again had to demonstrate right faith by repeating the symbolic indemnity condition for the restoration of Adam’s family, as he had when he was about to make the symbolic offering. This is the reason Abraham once again put Sarah in the position of his sister and let her be taken by a king, this time Abimelech of Gerar. After she became the king’s wife, Abraham took her back. This time Abraham also took back with him slaves, who symbolized humanity, and riches, which symbolized the natural world (Gen. 20:1-18).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 헌제(獻祭)를 어떻게 하였는가? 아브라함이 그의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祝福)의 자식으로 받았던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기 위하여 죽이려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 : 12)고 말씀하셨다.
How did Abraham offer Isaac? When they came to the place of which God had told him, Abraham built an altar there, and laid the wood in order, and bound Isaac his son, and laid him on the altar, upon the wood. Then Abraham put forth his hand, and took the knife to slay his son. But the angel of the Lord called to him from heaven, and said, “Abraham, Abraham!” And he said, “Here am I.” He said, “Do not lay your hand on the lad or do anything to him; for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seeing you have not withheld your son, your only son, from me” (Gen. 22:9-12).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나 그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과 충성에서 나온 행동은, 벌써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하였기 때문에 이삭으로부터 사탄을 분리하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탄이 분리된 이삭은 벌써 하늘편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제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에 대한 책망과 이삭 헌제의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아울러 강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Abraham’s faith was absolute. In obedience to God’s command, he was about to kill Isaac, his only son, intending to offer him as a burnt offering. God intervened at that moment and told Abraham not to kill the boy. Abraham’s zeal to do God’s Will and his resolute actions, carried out with absolute faith, obedience and loyalty, lifted him up to the position of already having killed Isaac. Therefore, he completely separated Satan from Isaac. God commanded Abraham not to kill Isaac because Isaac, now severed of all ties to Satan, stood on God’s side. We must also understand that when God said, “now I know . . .” He revealed both His reproach to Abraham for his earlier failure in the symbolic offering and His joy over the successful offering of Isaac.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Because Abraham succeeded in his offering of Isaac,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in Abraham’s family could be carried on by Isaac.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이삭을 다시 하늘편으로 분립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노정(攝理路程)을 출발하기 위하여, 모리아산상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는 데 3일 기간을 소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3일 기간은 그 이후 에도 계속하여 새로운 섭리노정을 출발하는 데 있어서의 사탄을 분립하는 기준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야곱도 하란에서 그 가족을 이끌고 가정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출발할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이 있었고(창 31 : 20∼22), 모세도 역시 애급(埃及)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을 지난 후에야 홍해(紅海)를 향해 출발하였었다(출 8 : 27∼29). 예수님도 영적으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실 때 사탄 분립의 무덤 3일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본진에 앞서 그들을 인도한 법궤가 사탄분립의 3일노정을 걸었던 것이다(수 3 : 1∼6).
Abraham took three days to reach the place on Mt. Moriah where he was to offer his son Isaac as a burnt offering. This three-day period for purifying Isaac was to begin a new course in the providence. Thenceforth, a three-day period has been required for the separation of Satan at the start of new dispensations. We find many instances of such periods in the history of the providence. When Jacob was setting out from Haran with his family to begin the family course to restore Canaan, there was a three-day period for the separation of Satan (Gen. 31:20-22). Moses, too, led the Israelites through a three-day period for the separation of Satan as they left Egypt to begin the national course to restore Canaan (Exod. 8:27). When Jesus began the worldwide spiritual course to restore Canaan, he spent three days in the tomb to accomplish the separation of Satan.
3.1.2.3 Isaac’s Position and His Symbolic Offering in the Sight of God
아브라함은 일단 그의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하였지만, 그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룰 수 있는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다는 데 관해서는 이미 위에서 상론(詳論)한 바 있다. 그러나 예정론(豫定論)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고 실패한 장본인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또 다시 같은 섭리를 되풀이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상징헌제에서 실패한 아브라함을 실패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던 것이고, 또 그로부터 연장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연장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창 22 : 2).
It was explained earlier that although Abraham’s symbolic offering ended in failure, there remained some grounds in the Principle for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to be established centered on him. Yet since he had failed to fulfill his responsibility, Abraham was not qualified to repeat the symbolic offering himself (cf. Predestination 3). Somehow, God had to find a way to regard Abraham as though he had not failed in the symbolic offering or caused the prolongation of the providence. To achieve this, God commanded Abraham to offer Isaac as a burnt offering.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이삭)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 : 4∼5)고 하심으로써 이삭을 통하여 선민(選民)을 부르실 것을 약속하셨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죽이려 했던 충성은, ‘상징헌제’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과 같은 입장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삭을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도 이삭과 같이 죽은 입장에서, 침범하였던 사탄을 분립함과 동시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로 침범했던 사탄을 분립하였고, 더 나아가서 뜻을 중심하고 이삭과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God had previously promised Abraham that He would raise up a chosen people from the lineage of Isaac, saying: Behold,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him, “. . . your own son shall be your heir.” And he brought him outside and said, “Look toward heaven, and number the stars, if you are able to number them.” Then he said to him, “So shall your descendants be” (Gen. 15:4-5). When Abraham was prepared to slay his son, even the son of the promise, he demonstrated utmost loyalty to Heaven. This act of faith was tantamount to Abraham killing himself – a self which had been defiled by Satan due to his earlier failure in the symbolic offering. Accordingly, when God saved Isaac from death, Abraham was also resurrected to life, now loosed from all the ties with which Satan had bound him when his symbolic offering was defiled. Furthermore, Abraham and Isaac attained inseparable oneness in their fidelity to God’s Will.
이와 같이 죽음의 자리에서 같이 살아난 이삭과 아브라함은 서로 그 개체는 다르면서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한 몸이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심한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삭을 중심한 섭리에로 연장되더라도 그 섭리에서 이삭이 성공만 하면 이 성공은 바로 이삭과 한 몸 된 아브라함의 성공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섭리는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연장되었어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아브라함이 실패도 하지 않았고 또 그 섭리가 연장도 되지 않은 것과 같이 되었던 것이다.
Though Isaac and Abraham were two different individuals, when God brought them back to life, they became as one person in the sight of God. Even though the dispensation through Abraham had failed and was prolonged through Isaac, as long as Isaac succeeded, Isaac’s victory would become Abraham’s own victory. Therefore, God would be able to regard Abraham as not having failed and the dispensation as not having been prolonged.
이삭 헌제 때의 그의 연령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가 번제(燔祭)에 쓸 나무를 지고 갔을 뿐만 아니라(창 22 : 6), 번제에 쓰일 양(羊)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그의 부친(父親)에게 물어 봤던 것(창 22 : 7)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이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때에 이삭 자신이 그것을 협조하였으리라는 사실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It is not clear how old Isaac was when Abraham offered the boy as a sacrifice. He was old enough to carry the wood for the sacrifice (Gen. 22:6), and when he saw there was no lamb to be offered, he inquired of his father about it (Gen. 22:7). Isaac was apparently old enough to understand his father’s intentions. We can infer that he helped his father, even though he knew that his father was preparing to offer him as the sacrifice.
이와 같이 뜻에 대한 사리(事理)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이삭이, 만일 번제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려는 부친에게 반항하였다면 하나님이 그 이삭 헌제를 받으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충성과 그에 못지않은 이삭의 충성이 합동하여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사탄을 분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헌제를 중심하고 이삭과 아브라함이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첫째로 아브라함은 ‘상징헌제’ 실수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그 실수 이전의 입장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해 가지고 그 입장에서 자기의 섭리적인 사명을 이삭에게 인계할 수 있게 되었고, 둘째로 이삭으로서는 그가 뜻 앞에 순종굴복(順從屈伏)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늘의 사명을 이어받아, 다음에 ‘상징헌제’를 드리기 위한 믿음을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If Isaac had resisted his father’s attempt to offer him as a sacrifice, God definitely would not have accepted the offering. In fact, Isaac demonstrated a faith as great as that of Abraham. Together, their faith made the offering successful, and there was no way for Satan to retain his hold on them. In making the offering, Isaac and Abraham underwent a process of death and resurrection. As a result, two things were accomplished. First, Abraham succeeded in the separation of Satan, who had invaded him because of his mistake in the symbolic offering. He restored through indemnity the position he had occupied before he had made the mistake and transferred his providential mission to Isaac from this restored position. Second, by faithfully obeying God’s Will, Isaac inherited the divine mission from Abraham and demonstrated the faith which qualified him to make the symbolic offering.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에게로 옮겨진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 : 13)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으로 번제(燔祭)를 드렸으니, 이것은 그대로 이삭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워진 ‘상징헌제(象徵獻祭)’가 된 것이었다.
After the divine mission had passed from Abraham to Isaac, Abraham offered the ram provided by God as the substitute for Isaac: Abraham lifted up his eyes and looked, and behold, behind him was a ram, caught in a thicket by his horns; and Abraham went and took the ram, and offered it up as a burnt offering instead of his son (Gen. 22:13). In fact, this was the symbolic offering by which Isaac restored the foundation of faith.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던 사실로 보아 아브라함이 수양을 번제로 드리는 데 있어서도 이삭이 그를 협조하였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드렸다 하였지만, 뜻으로 보면 그와 한 몸 되어 그의 사명을 계승한 이삭 자신이 헌제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명을 인계하고 그를 대신한 입장에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던 것이다.
Since Isaac had carried the wood for the sacrifice, we can infer that he participated in the offering of the ram. Thus, even though it is written that Abraham made the symbolic offering, Isaac, who had united with Abraham and inherited his mission, was given providential credit for the offering. In this way, Isaac, having inherited Abraham’s mission, made the symbolic offering and restored through indemnity the foundation of faith.
Ⅱ. 실체기대
3.2 The Foundation of Substance
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을 대신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로서,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렸으므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려면, 여기에서 또다시 그의 자식 에서와 야곱을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 분립하여 놓고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Isaac thus became the central figure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faith in place of Abraham. He established the foundation of faith by making the symbolic offering of the ram in a manner acceptable to God. To establish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in Isaac’s family, the foundation of substance had to be laid next. For this purpose, Isaac’s sons, Esau and Jacob, had to be placed in the divided positions of Cain and Abel respectively. By making the substantial offering, they were responsible to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and lay the foundation of substance.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이삭과 그의 이복형(異腹兄)이 되는 이스마엘이 각각 아벨과 가인의 입장에 서 가지고 가인과 아벨이 이루지 못하였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헌제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입장에 이삭을 대신 세우시고 이스마엘과 이삭의 입장에는 각각 에서와 야곱을 대신 세우시어 그들로 하여금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는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한 에서와 야곱은 아담을 중심한 가인과 아벨의 입장인 동시에 노아를 중심한 셈과 함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If Abraham had not failed in the symbolic offering, Isaac and his half-brother Ishmael would have stood in the positions of Abel and Cain. They would have been responsible to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which Cain and Abel did not accomplish. However, because Abraham failed in the offering, God set up Isaac in the position of Abraham, and Esau and Jacob in the positions originally intended for Ishmael and Isaac. It was then up to Esau and Jacob to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For the purpose of making the substantial offering, Esau and Jacob were in the same positions under their father Isaac as Cain and Abel in relation to Adam, and as Shem and Ham in relation to Noah.
맏아들 에서와 둘째 아들 야곱은 각각 사탄이 침범한 아브라함의 첫째 번 ‘상징헌제’와 사탄을 분립한 둘째 번 이삭 헌제의 상징이었으며, 또 그들은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서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해야 될 악(惡)과 선(善)의 표시체들이었다. 에서와 야곱이 태중(胎中)에서부터 싸운 것은(창 25 : 22∼23) 이와 같이 그들이 각각 악과 선의 표시체로 분립되었던 가인과 아벨의 입장으로서 상충적인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태중에서부터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 것도(롬 9 : 11∼13), 그들은 각각 아벨과 가인의 입장에서 저들의 헌제 실패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해야 할 선악의 표시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Isaac’s eldest son Esau represented Abraham’s first symbolic offering defiled by Satan, while the second son Jacob represented the offering of Isaac by which Satan was separated. Moreover, Esau assumed the role of Cain as the representative of evil, while Jacob stood in the position of Abel as the representative of goodness. Esau and Jacob began fighting inside their mother’s womb (Gen. 25:22-23) because they were in these opposing positions. Even then, God loved Jacob and hated Esau (Rom. 9:11-13), but this was for a providential reason: they were supposed to restore through indemnity the mistakes which Cain and Abel had made in their offering.
에서와 야곱이 ‘실체헌제’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는 먼저 야곱이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그런데 야곱은 다음과 같이 ‘실체헌제’의 중심인물이었던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고 ‘실체헌제’를 거친 후에,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말미암은 400년 간의 탕감노정(蕩減路程)을 걷기 위하여 애급(埃及)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However, before Esau and Jacob could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and make the substantial offering, Jacob first had to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the position of Abel. In all, Jacob had the following missions: First, he should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the position of Abel, the central figure of the substantial offering. Next, he should make the substantial offering. Finally, as will be discussed in the next section, Jacob would enter Egypt to commence the four-hundred-year course of indemnity required of his descendants because of Abraham’s mistake in the symbolic offering. Jacob made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the position of Abel in the following manner.
첫째로, 야곱은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개인적으로 복귀하는 싸움에서 승리의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사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장자의 입장에서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차자(次子)의 입장에서 그 장자의 기업을 빼앗아 나오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장자를 미워하고 차자를 사랑하셨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말 1 : 2∼3). 그런데 장자의 기업을 복귀해야 할 사명을 띠고 복중에서부터 부름을 받은 야곱은 차자의 입장에서 지혜롭게 떡과 팥죽으로써 에서로부터 그 장자의 기업을 빼앗았던 것이다(창 25 : 34). 야곱은 장자의 기업을 중히 여기어 그것을 복귀하려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그를 축복하게 하셨고(창 27 : 27), 이에 반하여 에서는 그것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릴 정도로 경홀(輕忽)히 여겼기 때문에 그를 축복하시지 않았다.
First, Jacob fulfilled the condition of victory in the fight to restore on the individual level the birthright of the eldest son. Because Satan took dominion over the universe created by God, Satan assumed the position of the eldest son. God was cast in the position of the second son, from which He had to work His way toward restoring the birthright. For this reason, God has favored second sons over firstborn sons, as in the case of Esau and Jacob: “I have loved Jacob but I have hated Esau” (Mal. 1:2). Jacob, as the second son who had the responsibility to restore the birthright of the firstborn son, cleverly obtained it from Esau in exchange for some bread and a pottage of lentils (Gen. 25:29-34). Because Jacob highly valued the birthright and worked to reclaim it from his brother, God had Isaac bless him (Gen. 27:27-29). On the contrary, God did not bless Esau, because he thought so little of his birthright that he traded it for a bowl of lentil pottage.
둘째로, 야곱은 사탄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 21년 간을 고역(苦役)하면서 가정과 재물을 중심하고 장자의 기업을 복귀하는 싸움에서 승리해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Second, Jacob went to Haran, which represented the satanic world. After suffering through twenty-one years of drudgery, he triumphed over Laban in the fight to restore the birthright by gaining family and wealth as his due inheritance. After winning this victory, Jacob returned to Canaan.
셋째로, 야곱은 하란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천사(天使)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실체로써 천사에 대한 주관성(主管性)을 복귀하였던 것이다. 야곱은 이와 같이 하여 드디어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함으로써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중심인물이 되었었다.
Third, on his way back to Canaan, the land of the promised blessing, Jacob triumphed in wrestling with an angel at the ford of Jabbok, thereby restoring dominion over the angel in a substantial struggle. Through these three victories, Jacob restored through indemnity the position of Abel. Thereupon, Jacob became the central figure of the substantial offering.
이로써 에서와 야곱은 하나님이 아벨의 헌제를 받으셨을 때의 가인과 아벨의 입장을 확립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에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그를 중보(仲保)로 세우며, 그의 주관을 받는 입장에서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축복을 받은 야곱으로부터 선(善)을 이어받음으로써 선을 번식하는 입장에 서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 에서는 야곱이 하란에서 21년 간의 고역(苦役)을 마치고 하늘편 처자(妻子)와 재물을 취하여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그대로 그를 사랑하고 환영하였기 때문에(창 33 : 4)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담가정의 가인과 아벨, 또 노아가정의 셈과 함이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실패하였던 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게 되었었다.
Esau and Jacob thus secured the positions in which Cain and Abel had stood at the moment when God accepted Abel’s offering. Accordingly, for Jacob and Esau to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Esau needed to love Jacob, respect him as his mediator to God, obediently submit to Jacob’s directions, and finally, multiply goodness by inheriting goodness from the bearer of God’s blessing. Indeed, when Jacob returned to Canaan with his family and wealth after enduring twenty-one years of hardship in Haran, he moved Esau to overcome his former hostility: And Jacob lifted up his eyes and looked, and behold, Esau was coming, and four hundred men with him. So he divided the children among Leah and Rachel and the two maids. And he put the maids with their children in front, then Leah with her children, and Rachel and Joseph last of all. He himself went on before them, bowing himself to the ground seven times, until he came near to his brother. But Esau ran to meet him, and embraced him, and fell on his neck and kissed him, and they wept (Gen. 33:1-4). When Esau opened his arms and affectionately welcomed Jacob, they fulfilled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For the first time, the foundation of substance was laid successfully. When Jacob and Esau succeeded in making the substantial offering, they restored through indemnity the previous failures in making substantial offerings: the failures of Cain and Abel in Adam’s family and of Ham and Shem in Noah’s family.
이와 같이 에서와 야곱이 ‘실체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실체기대(實體基臺)’를 탕감복귀하여 나온 종적인 역사노정을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노정 중 이삭가정에서 비로소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
Their victory in the providence centered on Abraham also restored through indemnity, horizontally in one family, the long vertical course of history in which God had been working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substance.
하나님이 에서를 태중(胎中)에서부터 미워하셨다고 로마서 9장 11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 같이 그는 야곱에게 굴복하여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였기 때문에 복귀한 가인의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어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만 그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맞추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사탄편인 가인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입장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Esau had been in the position to be hated by God from the time he was inside his mother’s womb (Rom. 9:11-13) only because he had been given the role of Cain, who was on Satan’s side, for the purpose of setting up an indemnity condition in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Once he submitted to Jacob and completed his portion of responsibility, he stood in the position of restored Cain and was at last able to receive God’s love.
Ⅲ. 메시아를 위한 기대
3.3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아담가정에서부터 세우려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복귀섭리의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3시대에 걸쳐 연장되어 아브라함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러나 이 뜻을 완성해야 할 아브라함이 또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이 뜻은 다시 이삭에게로 연장되었었다. 그런데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짐으로써 이때에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는 응당 이때에 강림(降臨)하셔야 될 것이었다.
God’s work to lay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which He first tried to establish in Adam’s family, had to be conducted three times because the central figures of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could not fulfill their portion of responsibility. The third attempt was in Abraham’s time, yet even this was prolonged when he failed in the symbolic offering. Isaac and his family inherited the Will and laid the foundation of faith and the foundation of substance. At last,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was established. One would expect that the Messiah would have come on the earth at that time.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중심하고 볼 때, 메시아를 맞기 위한 이 기대의 사회적인 배경은 어떠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However,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also requires a social environment conducive to his coming.
타락인간(墮落人間)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하는 것은 이미 사탄을 중심하고 이루어진 세계를 메시아를 위한 왕국으로 복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아담가정이나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는 그 가정을 침범할 수 있는 다른 가정이 없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만 이루어지면 그 기대(基臺) 위에 메시아는 오시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에는 이미 타락인간들이 사탄을 중심한 민족을 형성하여 아브라함가정에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기대 위에 바로 메시아가 강림하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 기대가 사탄세계와 대결할 수 있는 민족적인 판도 위에 세워진 후에야 비로소 메시아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지 않고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성공하여 그때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기대를 중심하고 그 후손이 가나안 땅에서 번성하여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고서는 메시아를 맞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상징헌제’에 실수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벌로서,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조성한 이삭의 후손들은 고향을 떠나 이방(異邦)에 들어가서 400년 간을 고역(苦役)하면서 민족적인 기대를 세워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The foundation must make it feasible for this satanic world to be restored into God’s Kingdom ruled by the Messiah. In the providence in Adam’s and Noah’s families, there were no other families which could possibly attack or corrupt the central family. If either of these families had laid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on the family level, the Messiah could have come without opposition. However, by Abraham’s time, fallen people had already built up satanic nations which could easily overpower Abraham’s family. Hence, even though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was laid at that time, it was a limited foundation, on the family level. The Messiah could not have safely come on that foundation. A foundation of a sovereign state was needed to cope with the nations of the satanic world. Such support would have been necessary even if Abraham had not failed in the symbolic offering, but had succeeded with his sons, Isaac and Ishmael, in making the substantial offering to lay the family foundation for the Messiah. It still would not have been safe for the Messiah to come until Abraham’s descendants had multiplied in Canaan and established a national foundation for the Messiah. As it was, though the descendants of Isaac had established the family foundation for the Messiah, they would leave their homeland and suffer in a foreign land for four hundred years as the penalty for Abraham’s mistake. Despite their suffering in Egypt, they would flourish and consolidate as a people. They would return to Canaan and build the national foundation for the Messiah as a sovereign nation prepared for the Messiah and his work (cf. Moses and Jesus 2.2.3.3).
그러면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말미암아 그 후손에게 남아진 탕감노정(蕩減路程)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였던가? 그것은 이삭이 아니고 야곱으로부터였다. 왜냐하면 위에서 이미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모든 탕감노정을 중심적으로 걸어야 할 인물은 ‘실체헌제(實體獻祭)’의 중심인 아벨형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가정에서는 아벨, 노아가정에서는 함, 아브라함가정에서는 이삭, 그리고 이삭가정에서는 야곱이 각각 그 가정의 탕감노정을 중심적으로 걸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야곱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 선 아벨형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음에 메시아가 걸으셔야 할 사탄 분립의 전형노정(典型路程)을 먼저 본보기로 걸어야 했던 것이다(후편 제2장 제1절).
A course of indemnity had been placed upon the shoulders of Abraham’s descendants due to his mistake in the symbolic offering. Jacob was to begin this course of indemnity, not Isaac. Indeed, the one who shoulders the major burden in walking the course of indemnity is the Abel-type person who serves as the central figure of the substantial offering. Abel in Adam’s family, Ham in Noah’s family, Isaac in Abraham’s family, and Jacob in Isaac’s family carried the major burdens in walking the indemnity courses set down for their families. Among them, Jacob was the only Abel figure who stood upon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Therefore, he would walk the model course for the separation of Satan, setting the pattern for the Messiah to follow at his coming (cf. Moses and Jesus 1).
그리하여 야곱가정은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아브라함이 지은 죄를 담당하고 400년 간의 탕감노정을 걸음으로써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어야 했기 때문에, 이삭가정과 같은 입장에서 이 탕감노정을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Jacob’s family stood upon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which had been completed in Isaac’s family. Inheriting the position of Isaac’s family, they set out to complete the dispensation entrusted to Abraham by taking responsibility for Abraham’s sin and embarking upon the four-hundred-year course of indemnity.
즉 이삭가정에 있어서 아벨의 입장인 야곱이 모든 탕감노정을 걸었던 것과 같이, 야곱가정에 있어서는 야곱의 하늘편 처(妻) 라헬의 소생인 요셉이 먼저 애급(埃及)으로 들어가 그 탕감노정을 걸음으로써 아벨의 입장을 확립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형들에 의하여 애급으로 팔려 가서 30세에 애급의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된 후에 그가 어렸을 때 하늘에서 몽시(夢示)로써 예시해 주셨던 대로(창 37 : 5∼11), 먼저 야곱의 사탄편 처 레아의 소생인 이복형(異腹兄)들이 그에게 가서 굴복함으로써 자녀들이 먼저 입애급노정(入埃及路程)을 걷게 되었고, 다음으로는 그의 부모가 같은 노정으로 인도되었었다. 그리하여 야곱가정은 장차 메시아를 민족적으로 맞기 위한 탕감노정을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In Isaac’s family it was Jacob, in the position of Abel, who walked the entire course of indemnity. In Jacob’s family it was Joseph, the son of Rachel – Jacob’s wife on God’s side – who was to secure the position of Abel by entering Egypt and walking the course of indemnity. After being sold into slavery by his brothers and brought to Egypt, Joseph rose to the office of prime minister of Egypt by the age of thirty. He witnessed the realization of a prophecy which God had given him in his dreams while he was still a child (Gen. 37:5-11). First, Joseph’s half brothers, born of Leah – Jacob’s wife on Satan’s side – entered Egypt and surrendered themselves to him. Later, all of Jacob’s children entered Egypt, and finally they brought their father to Egypt. In this way, Jacob’s family began the indemnity course to build a nation which would one day receive the Messiah.
이와 같이 이삭을 중심한 섭리는 또 야곱을 중심한 섭리노정(攝理路程)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이 개체는 다르지만 뜻으로 볼 때 한 몸이었던 것과 같이, 야곱은 이삭가정을 중심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운 ‘실체기대(實體基臺)’의 중심인물로서 아브라함이 지은 죄를 담당하고, 장차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워 가지고 이삭의 뜻을 민족적으로 이루어야 할 탕감노정을 출발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서로 개체는 다르나 뜻으로 보면 모두 한 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의 성공은 곧 이삭의 성공이요, 이삭의 성공은 곧 아브라함의 성공이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삭과 야곱에로 연장되었으나 뜻을 중심하고 보면 연장되지 않고 그 당대에 이루어진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 : 6)고 한 말씀은 바로 이러한 섭리노정에 입각해 볼 때, 그들은 3대이면서도 뜻으로 보면 하나의 ‘뜻’을 공동으로 이룩한 선조들로서 1대와 같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Jacob, as the central figure who laid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in Isaac’s family, was responsible to shoulder Abraham’s sin. He was also responsible to embark upon an indemnity course to realize on the national level the Will which had been entrusted to Isaac. Therefore, as was the case with Abraham and Isaac, God regarded Abraham, Isaac and Jacob as the same person with respect to His Will, even though they were three different individuals. Accordingly, Jacob’s success meant Isaac’s success, and Isaac’s success meant Abraham’s success.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centering on Abraham, though it was extended to Isaac and Jacob, came to be regarded in the sight of God as having been accomplished in Abraham’s own generation without any prolongation. It is written, “I am the God of your father,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Exod. 3:6). This verse indicates that although they were three generations, God regarded as one generation these ancestors who collectively accomplished His Will.
실상 하나님은 야곱가정으로 하여금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에 들어가 400년 고역의 길을 걷게 하시면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말씀대로 선민(選民)을 세워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한 후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우게 하심으로써, 이 기대 위에 메시아를 보내시어 복귀섭리를 완수하려 하셨던 것이다.
God intended to fulfill the goal of His providence by establishing the national foundation for the Messiah and sending the Messiah to that prepared nation. To accomplish this, God had Jacob’s family enter Egypt, the satanic world, where they would suffer as slaves for four hundred years. Then, as promised to Abraham, God would raise them up as the chosen people and bring them back to Canaan.
그러므로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결과적으로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탕감노정(蕩減路程)의 출발기대(出發基臺)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은 결과적으로 다음 시대에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우기 위한 출발기대를 조성하는 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established in Isaac’s family became the basis upon which to begin the course of indemnity to establish the national foundation for the Messiah. The period of two thousand years from Adam to Abraham was in effect the period to lay the basis for this national providence to begin in the next era.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인한 탕감노정을 담당한 야곱은 하늘 뜻을 위한 지혜로써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빼앗는 개인적인 싸움에서 성공하였고, 사탄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 그의 외숙부(外叔父) 라반으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가정적으로 빼앗는 21년 간의 싸움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또 천사(天使)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인간 조상이 타락된 이후 타락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천사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써 선민(選民) 형성의 기틀을 잡았던 것이다.
In conclusion, Jacob was victorious in taking responsibility for the indemnity course to pay for Abraham’s mistake. By using his wisdom for the sake of God’s Will, Jacob triumphed as an individual in his struggle with Esau to win the birthright. He entered Haran and, as a family, triumphed in a twenty-one-year struggle with his uncle Laban to win the birthright. On his way back from Haran to Canaan, Jacob was victorious in the fight with the angel. He was the first fallen man to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dominion over the angel. Thereupon, he received the name “Israel” (Gen. 32:28), signifying that he set the pattern and laid the groundwork upon which the chosen people would be established.
야곱은 이러한 노정을 걸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비로소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으므로, 그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전형노정(典型路程)을 성공적으로 걷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형노정을 따라서 모세도 걸었고 예수님도 걸으셨으며 이스라엘 민족도 또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사는 사탄을 민족적으로 굴복시켜 온 그 전형노정의 사료(史料)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사가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중심사료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fter returning to Canaan with these victories, Jacob won Esau’s heart, and together they fulfilled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Jacob thus victoriously completed the model course to bring Satan to submission. Moses, Jesus, and even the people of Israel would walk this course after the pattern set by Jacob. The history of Israel can serve as a good historical source for understanding the course to bring Satan to submission on the national level. For this reason, it is central to the study of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3.4 Some Lessons from Abraham’s Course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첫째로 우리에게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복귀섭리는 하나님의 힘만으로써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이 합해져서만 비로소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으나,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First, Abraham’s course demonstrates that God’s predestination concerning the manner in which His Will is fulfilled is conditional.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cannot be fulfilled by God’s power alone; it can only be fulfilled in conjunction with the human portion of responsibility. Hence, although God called upon Abraham for the purpose of fulfilling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when he failed to complete his responsibility, God’s Will was not fulfilled.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예정하셨으나, 아브라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명은 이삭을 거쳐 야곱에로 옮겨졌던 것이다.
Second, Abraham’s course demonstrates that God’s predestination concerning human beings is conditional. Although God preordained Abraham to be the father of faith by succeeding in his offering, when he could not complete his responsibility, this mission extended to Isaac and Jacob.
셋째로 복귀섭리는 인간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할 때에 그 뜻은 필연적으로 연장되고, 동시에 그것을 복귀하려면 보다 큰 것으로서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서는 동물을 제물(祭物)로 바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뜻이, 그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Third, Abraham’s course shows us that when human beings fail to complete their responsibility, the fulfillment of God’s Will is always delayed, and its restoration requires fulfillment of a greater indemnity condition. In Abraham’s case, God’s Will was to be accomplished by merely sacrificing animals; upon his failure, however, it had to be accomplished by offering his beloved son, Isaac, as a sacrifice and had to be completed through Isaac and Jacob.
넷째로는 제물을 쪼개는 것으로써, 우리들도 각자를 제물로서 쪼개어 선과 악으로 분립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제물의 입장에 세워 놓고 선과 악으로 쪼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축(牲畜)의 제물로 바치는 생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고 자신을 쪼개지 않을 때에는 거기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Fourth, Abraham’s cutting the sacrifices in two provides a lesson that each of us must divide our own self as an offering to separate good from evil. A life of faith involves putting ourselves in the position of an offering. Only by dividing good from evil in ourselves can we become living offerings pleasing to God. We should constantly separate good from evil within ourselves, according to the standard of God’s Will. If we neglect to do this, a condition is set up for Satan to inv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