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아벨이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전 위에서 그의 대신으로 셋을 세우셨다(창 4 : 25). 그리하여 그 후손에서 노아의 가정을 택하시사 아담가정의 대신으로 세우시어 새로운 복귀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Cain killed Abel, thereby preventing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in Adam’s family from being accomplished. Nevertheless, God had predestined absolutely the fulfillment of the purpose of creation, and His Will remained unchangeable. Hence, upon the foundation of the loyal heart which Abel demonstrated toward Heaven, God chose Seth in his place (Gen. 4:25). From among Seth’s descendants, God chose Noah’s family to substitute for Adam’s family and commenced a new chapter in His providence.
창세기 6장 13절에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하신 것을 보면 그때도 말세(末世)였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홍수심판 후 노아가정을 터로 하여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아가정도 먼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고, 다음으로 그 기대 위에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아담가정이 복귀하지 못하였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It is written that God judged the world by the flood: “And God said to Noah, ‘I have determined to make an end of all flesh; for the earth is filled with violence through them; behold, I will destroy them with the earth’” (Gen. 6:13). This shows us that Noah’s time was the Last Days. God intended to accomplish the purpose of creation after the flood judgment by sending the Messiah upon the foundation laid by Noah’s family. For this reason, Noah’s family was responsible to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faith, and then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substance. They were to restore through indemnity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which Adam’s family had failed to lay.
Ⅰ. 믿음의 기대
2.1 The Foundation of Faith
2.1.1 The Central Figure for the Foundation of Faith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中心人物)은 노아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으로 이루시려다 못 이루신 뜻을 대신 이루시기 위하여 아담으로부터 1600년을 지나 10대 만에 노아를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찍이 아담에게 축복하셨던 것(창 1 : 28)과 마찬가지로 노아에 대해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던 것이다(창 9 : 7).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2 인간 조상이 된다.
In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through Noah’s family, Noah was the central figure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faith. God called Noah ten generations or sixteen hundred biblical years after Adam for the purpose of fulfilling the Will which He had intended to realize through Adam. Accordingly, God bestowed His blessings upon Noah, “be fruitful and multiply” (Gen. 9:7), much as earlier He had bestowed the three great blessings upon Adam (Gen. 1:28). In this sense, Noah was the second ancestor of humanity.
노아는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悖壞)하여 강포(强暴)가 땅에 충만한 때에 부름을 받아 (창 6 : 11), 120년 간이나 갖은 조롱과 비소를 받아 가며 하나님의 명령에만 절대 순종하여 평지도 아닌 산꼭대기에 방주(方舟)를 지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조건삼아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홍수심판(洪水審判)을 감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1 믿음의 조상인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노아가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아들 함의 범죄로 인하여 노아의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사명은 아브라함에게로 옮겨졌던 것이다.
Noah was called when “the earth was filled with violence” (Gen. 6:11). Enduring all kinds of derision and mockery, he worked for 120 years on a mountain to build the ark in absolute obedience to God’s instructions. Upon this condition of faith, God could bring on the flood judgment centered on Noah’s family. In this sense, Noah was the first father of faith. Although we commonly regard Abraham as the father of faith, in fact, Noah was to have had that honor. As we shall see, it was due to his son Ham’s sinful act that the mission of the father of faith was transferred from Noah to Abraham.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자기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이미 아벨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하늘을 대하여 충성(忠誠)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 위에서 부름을 받았고, 그는 또 혈통적으로 보더라도 아벨 대신 택함을 받은 셋(창 4 : 25)의 후손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의 위인(爲人)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義人)이었기 때문에(창 6 : 9) 그는 방주를 지어 그것으로써 직접 하나님에게 ‘상징헌제’를 드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In the case of Adam, it was explained that although he should have been the central figure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faith, he could not offer the sacrifice himself. Noah’s situation was different. He was called by God upon the foundation of Abel’s loyal and faithful heart in making an acceptable symbolic offering. In regard to his lineage, Noah was a descendant of Seth, who had been chosen to replace Abel. Furthermore, Noah was a righteous man in the sight of God (Gen. 6:9). For these reasons, he was qualified to make the symbolic offering to God by building the ark.
2.1.2 The Object for the Condition in Restoring the Foundation of Faith
노아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條件物)은 방주(方舟)였다. 그러면 그 방주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노아가 아담 대신 제2 인간 조상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었던 천주(天宙)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워야 한다. 따라서 신천주(新天宙)를 상징하는 어떠한 조건물을 제물로서 하나님 앞에 뜻맞게 바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물로 세웠던 것이 바로 방주였다.
The object for the condition by which Noah was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faith was the ark. The ark was full of symbolic significance.Before Noah could stand in place of Adam as the second human ancestor, he first had to make an indemnity condition for the restoration of the cosmos, which had been lost to Satan due to Adam’s fall. Hence, the object for this condition, which Noah had to offer in an acceptable manner, should symbolize the new cosmos. He offered the ark as this object.
방주는 3층으로 지었는데, 그 이유는 3단계의 성장과정을 통해서 창조된 천주를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식구가 여덟이었던 것은, 노아가 아담 대신의 입장이었으므로 일찍이 사탄에게 내주었던 아담가정의 여덟 식구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방주가 천주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주인으로 들어간 노아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 그의 식구들은 전인류(全人類)를 상징하였으며, 그 안에 들어간 동물들은 만물세계 전체를 상징했던 것이다.
The ark was built with three decks, symbolizing the cosmos which had been created through the three stages of the growing period. The eight members of Noah’s family who entered the ark represented the eight members of Adam’s family who, having been invaded by Satan, had to be restored through indemnity. Thus, the ark symbolized the cosmos; Noah, its master, symbolized God; the members of his family symbolized humanity; and the animals brought into the ark symbolized the entire natural world.
이와 같이 방주가 완성된 후에 하나님께서 40일 간의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하셨는데, 이 심판의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음란(淫亂)에 빠져서 이미 사탄을 대하고 있는 인류를 하나님이 또 하나의 주인의 입장에서 대하시어 비원리적인 섭리를 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대하시어 섭리하실 수 있는 대상을 세우시기 위하여 사탄의 상대가 되어 있는 전인류를 멸하시는 홍수심판의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After the ark was completed, God judged the world with the flood for forty days. What was the purpose of the flood?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Creation, human beings were created to serve only one master. Since humankind was under bondage to Satan, full of corruption and debauchery, for God to relate with them He would have to assume the position of a second master. That would be unprincipled. Therefore, God brought about the flood judgment, eliminating sinful humanity in order to raise up a family who would relate only with Him.
그러면 심판기간(審判期間)을 40일로 정하신 이유는 어디 있었던가? 후편 제3장 제2절 Ⅳ에서 논술하는 바, 10수는 귀일수(歸一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 이후 10대 만에 노아를 찾아 세우셨던 목적은, 아담을 중심하고 이루지 못하였던 뜻을 노아를 중심하고 탕감복귀하여 하나님에게로 재귀일(再歸一)시키기 위한 10수 복귀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세우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위기대(四位基臺)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4수를 복귀하 는 탕감기간으로써 각 대(代)를 세우시는 섭리를 노아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서 계속하여 오셨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기간은 40수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인간들의 음란으로 말미암아 이 40수 탕감기간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 방주(方舟)를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완성하는 섭리를 다시 하시기 위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이 4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 40일 심판 기간을 세워 가지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Why did God choose a forty-day period for the flood? The significance of the forty-day period should be understood in terms of the meaning of the numbers four and ten. The number ten signifies unity (cf. Periods 2.4). It was ten generations after Adam when God called upon Noah to restore through indemnity the Will which He could not fulfill through Adam. By fulfilling a period of indemnity containing the number ten, God meant to bring the dispensation back into unity with His Will. Furthermore, since the goal of restoration is to complete the four position foundation, God worked to raise up each of these ten generations by setting up an indemnity period to restore the number four. In total, the period from Adam to Noah was an indemnity period to restore the number forty. Due to the lustfulness of the people of those days, however, this indemnity period of the number forty was defiled by Satan. The dispensation of Noah’s ark was God’s new attempt to complete the four position foundation. Therefore, God set the period of the flood judgment at forty days as the indemnity period to restore the number forty, which had been defiled when the earlier period was lost to Satan. By fulfilling this numerical period of indemnity, God intended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faith.
이와 같이 되어 40수는 그 후의 탕감복귀섭리노정(蕩減復歸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사탄 분립수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 예를 들면, 노아 심판(審判) 40일을 비롯하여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 고역(埃及苦役) 400년, 모세의 두 차례에 걸친 금식기도(禁食祈禱) 40일, 가나안 정탐기간(偵探期間) 40일,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표류(曠野漂流) 40년,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의 재위기간(在位期間) 각 40년, 엘리야 금식 40일, 니느웨 멸망에 관한 요나의 예언(豫言) 40일, 예수님의 금식기도 40일과 부활기간(復活期間) 40일 등은 모두 사탄을 분립하는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The number forty thus became characteristic of dispensations for the separation of Satan, which are necessary for restoring the foundation of faith. There are many examples of this: Noah’s forty-day flood; the four hundred years from Noah to Abraham; the Israelites’ four hundred years of slavery in Egypt; Moses’ two forty-day fasts; the forty days of spying in Canaan; the Israelites’ forty years of wandering in the wilderness; the forty-year reigns of King Saul, King David and King Solomon; Elijah’s forty-day fast; Jonah’s prophecy that Nineveh would be destroyed in forty days; Jesus’ forty-day fast and prayer in the wilderness; and the forty-day period from Jesus’ resurrection to his ascension.
한편 성경을 보면 그 심판이 끝날 때에 노아가 방주(方舟)에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장차 이루실 어떠한 섭리를 예시(豫示)하셨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아모스 3장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In the Bible we read that at the end of forty days of rain, Noah sent forth from the ark a raven and a dove (Gen. 8:6-7). Let us examine what future providential situations this foreshadowed, as it is written, “Surely the Lord God does nothing, without revealing his secret to his servants the prophets” (Amos 3:7).
방주를 하나님의 뜻 앞에 합당한 것으로 세움으로써, 천주(天宙)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심판 40일 기간은 천지창조(天地創造)의 이상(理想)이 실현될 때까지의 혼돈기간(창 1 : 2)에 해당되는 기간이었다. 따라서 40일이 끝날 때에 방주를 중심하고 나타내 보이셨던 행사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완료한 이후의 전역사노정(全歷史路程)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By building the ark and passing through the forty-day flood judgment, Noah fulfilled an indemnity condition for the restoration of the cosmos. The flood corresponds to the period of chaos before the creation of the universe when “the Spirit of God was moving over the face of the waters” (Gen. 1:2). Accordingly, the works which God performed around the ark at the end of the forty-day flood symbolized the entire course of history following God’s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그러면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보내어 물이 마를 때까지 왕래하게 하신 것은(창 8 : 6∼7) 무 엇을 예시하신 것이었던가?
What was foreshadowed when Noah sent forth the raven, which circled about looking for a place to land until the waters subsided?
이것은 마치 인간 창조 직후에 천사장(天使長)이 해와의 사랑을 노렸었고, 또 가인과 아벨이 헌제(獻祭)를 할 때에도 사탄이 그들에게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과 같이(창 4 : 7), 홍수심판(洪水審判)이 끝날 무렵에도 사탄은 노아가정에 무슨 침범할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귀가 어디에 앉을 곳이 없는가 하고 물 위를 찾아 헤매는 모양으로써 표시하신 것이었다.
It signified that Satan would be looking for a condition through which he could invade Noah’s family, just as the Archangel vied for Eve’s love soon after the creation of human beings, and just as Satan couched at the door looking for an opportunity to invade the offerings of Cain and Abel (Gen. 4:7).
What was foreshadowed when Noah sent forth the dove three times?
성서에는 물이 준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비둘기를 내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비둘기를 내보내지 않고 창문으로 직접 내다보아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설혹 그 문들이 모두 봉해져 있었다 하더라도 비둘기가 나갈 수 있는 구멍으로 내다보아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둘기를 내보냈던 목적은 물이 준 것을 알려고 했던 것보다 더욱 중요한 데 있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숨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다.
Although it is written in the Bible that Noah sent out the dove to see if the water had subsided, that was not its only purpose.Certainly Noah could have looked out the opening from which he set forth the dove to examine the situation for himself. The sending forth of the dove had a deeper significance connected with the mysterious Will of God.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 홍수심판(洪水審判)이 있을 것을 선포하신지 7일 후에(창 7 : 10) 홍수가 시작되어 40일 심판기간이 지난 후에 첫번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런데 이 비둘기는 물 위를 왕래하다가 발붙일 곳이 없어서 다시 방주로 돌아가니, 노아가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 8 : 9).
Seven days after God proclaimed the flood judgment through Noah, the flood began (Gen. 7:10). Forty days later, the dove was first sent out. It flew about but then returned to the ark because it found no place to land, and Noah took it back inside (Gen. 8:9).
이 첫번 비둘기는 첫 아담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창세 전(創世前)부터 하나님 안에 있었던 그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이 아담이라는 완성실체(完成實體)로 실현되기를 원하시어 그를 지상에 창조하셨던 것인데, 그가 타락(墮落)되었기 때문에 그를 중심하고는 지상에 그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은 할수없이 그의 뜻 성사를 후일로 미루시고 그 이상(理想)을 일시 지상으로부터 거두어 들이셨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The dove, when it was sent out the first time, represented the first Adam. God created Adam with the hope that His ideal of creation, which He had cherished from before time, would be realized in Adam as the perfect incarnation of the divine ideal on earth. Due to Adam’s fall, however, God could not realize the divine ideal on earth through him. God thus had to withdraw His ideal from the earth for a time and postpone its fulfillment to a later date.
그다음에 7일을 지나 노아는 다시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나 그때에도 역시 물이 다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에 내려앉지를 못하고, 다음에는 앉을 수 있다는 표시로서 다만 감람나무 잎사귀를 입에 물고 다시 방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창 8 : 10∼11).
Seven days later, Noah sent forth the dove a second time. Still the water had not yet dried, and again the dove returned. This time it carried in its mouth an olive leaf, indicating that there would be a place for it to land the next time (Gen. 8:10-11).
둘째 번으로 내보낸 이 비둘기는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완성실체’로서 다시 오실 제2 아담 된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것이지만, 만일 유대인들이 불신(不信)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는 지상에 머무르실 수가 없게 되어 그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실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 그는 재림(再臨)하셔야 할 것을 약속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시하신 것이었다.
The dove, when it was sent out the second time, symbolized Jesus, the second Adam, whose coming would be God’s second attempt to realize the perfect incarnation of the divine ideal on the earth. These verses foreshadowed that if the chosen people were to disbelieve in Jesus at his coming, then he would have “nowhere to lay his head” (Luke 9:58) and thus would not be able to realize God’s complete Will on the earth. In that situation, Jesus would have to go to the cross and return to God’s bosom, leaving behind the promise of the Second Advent.
물론 이 예시는, 만일 그때에 땅에 물이 말라서 비둘기가 내려앉아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었다면 그 비둘기는 결코 방주(方舟)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인데, 물이 채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로 다시 돌아갔던 것과 같이, 장차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잘 믿고 모시면 그는 결코 죽지 않고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실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불신으로 흐르게 되면 예수님은 부득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재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The dove returned to the ark because the water had not yet dried up. By analogy, had more of the Jewish people faithfully attended Jesus, he would have found a secure place to stand among them. He would not have been crucified and would have gone on to build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그런 후 또다시 7일이 지나서 노아는 세번째로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물이 말랐었기 때문에 다시는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 8 : 12).
After another seven days had passed, Noah sent out the dove for the third time. This time the dove did not return to the ark, for the ground was dry (Gen. 8:12).
이 셋째 번의 비둘기는 제3 아담으로 오실 재림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반드시 지상에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 되어 다시는 그 이상이 지상에서 거두어지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제3차의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노아는 비로소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와 신천지(新天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제3 아담으로 인하여 창조이상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요한계시록 21장 1절 이하의 말씀대로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帳幕)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을 예시하신 것이었다.
The dove, when it was sent out the third time, symbolized Christ at the Second Advent, who is to come as the third Adam. This foreshadowed that when Christ comes again, he will surely be able to realize God’s ideal of creation, which will never again be withdrawn from the earth. When the dove did not return, Noah finally disembarked from the ark and walked upon the earth, which had been purged of sin and made new. This foreshadowed that when the ideal of creation is realized on the earth through the work of the third Adam, the new Jerusalem will descend from Heaven and the dwelling of God will be with men (Rev. 21:1-3).
이 비둘기를 세 번 내보낸 실례(實例)로써, 예정론(豫定論)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그 섭리의 대상인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연장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아담이 불신으로 인하여 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셔야 할 것과, 만일 유대인들도 불신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부득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어 제3 아담으로 재림(再臨)하셔야 할 것을 예시하신 것이었다.
The foreshadowing in this story should be interpreted in light of the principle explained earlier: God’s providence of restoration may be prolonged if the person entrusted with the providence fails in his responsibility (cf. Predestination 2). Due to Adam’s faithlessness and failure to complete his responsibility, Jesus had to come as the second Adam. Furthermore, if the Jewish people were to disbelieve in Jesus and thus fail to complete their responsibility, Christ would certainly have to come again as the third Adam.
그리고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천지(天地)를 창조하실 때에 7일이라는 기간이 있었던 것과 같이 그것을 다시 찾아 세우는 데에도 섭리적인 어떠한 기간이 지난 후가 아니면 아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Just as 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took a seven-day period, the seven-day intervals for sending forth the dove indicate to us that the restoration of heaven and earth requires certain providential periods of time.
이러한 가운데서 노아가정은 심판 40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인 방주(方舟)를 뜻맞게 찾아 세워 그 기대(基臺)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었던 것이다.
On that ground Noah’s family, with the judgement of 40 days, could restore through indemnity the foundation by fulfilling the dispensation of the ark which was an object for the condition restoring the foundation of faith exactly as God had intended.
Ⅱ. 실체기대
2.2 The Foundation of Substance
노아는 방주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제물로 바쳐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다. 이로써 노아는 만물(萬物)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동시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엔 이 기대 위에서 노아의 아들 셈과 함이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서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성공하면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Noah successfully restored through indemnity the foundation of faith by fulfilling the dispensation of the ark and thereby making a symbolic offering acceptable to God. In doing so, Noah fulfilled both the indemnity condition for the restoration of all things and the indemnity condition for the symbolic restoration of human beings. Upon this foundation, Noah’s sons, Shem and Ham, were then to have stood in the position of Cain and Abel, respectively. Had they then succeeded in the substantial offering by fulfilling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they would have laid the foundation of substance.
노아가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한 후에 이 가정의 ‘실체헌제(實體獻祭)’가 뜻맞는 것으로 바쳐지기 위하여서는, 먼저 ‘실체헌제’의 중심이 되어야 할 차자(次子) 함이 아담가정의 ‘실체헌제’의 중심이었던 차자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다. 아담 때에는 아벨 자신이 아담의 대신으로 ‘상징헌제’를 하였기 때문에, 아벨이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 동시에 ‘실체헌제’의 중심으로도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 때는 함이 아니고 노아 자신이 ‘상징헌제’를 하였기 때문에, 함이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와 심정적으로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For Noah’s family to make an acceptable substantial offering, Ham, Noah’s second son, was to restore the position of Abel, Adam’s second son. He was supposed to become the central figure of the substantial offering, just as Abel was the central figure of his family’s substantial offering. In Adam’s family, Abel had successfully made the symbolic offering in Adam’s place to restore through indemnity the foundation of faith and to be qualified as the central figure of the substantial offering. In the case of Noah’s family, it was Noah, not Ham, who made the symbolic offering. Therefore, for Ham to stand in the position of Abel, as one who has succeeded in making the symbolic offering, he had to become inseparably one in heart with his father, Noah.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함으로 하여금 노아와 심정적으로 일체적인 입장에 서게 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섭리(攝理)를 하셨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Let us examine how God worked to help Ham become one in heart with Noah.
창세기 9장 20절 내지 26절에 씌어 있는 기록을 보면, 함은 그의 부친 노아가 장막(帳幕) 안에서 나체(裸體)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 형제 셈과 야벳을 선동(煽動)하였다. 이때에 그들도 함의 선동에 뇌동(雷同)되어 그의 부친의 나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이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그 부친의 몸에 옷을 덮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죄가 되어 노아는 함을 저주하여 이르기를 그 형제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The Bible reports that when Ham saw his father lying naked in his tent, he felt ashamed of Noah and took offense. Ham stirred up the same feelings in his brothers, Shem and Japheth. Swayed by Ham to feel ashamed of their father’s nakedness and turning their faces so as not to behold the sight, they walked backwards and covered their father’s body with a garment. This act constituted a sin, so much so that Noah rebuked Ham, cursing his son to be a slave to his brothers (Gen. 9:20-25).
Why did God conduct this dispensation? Why was it such a sin to feel ashamed of nakedness?
이러한 내용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어떻게 되면 죄가 되는가 하는 문제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사탄도 어떤 대상을 세워 그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授受)의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존재 및 활동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든지 그에게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어 사탄의 상대가 됨으로써 사탄이 활동할 수 있게 될 때 거기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To understand these matters, let us first recall what constitutes sin (cf. Fall 4.5). Satan cannot manifest his powers – including the power to exist and act – unless he first secures an object partner with whom he can make a common base and engage in a reciprocal relationship of give and take. Whenever a person makes a condition for Satan to invade, it means that he has allowed himself to become Satan’s object partner, thereby empowering Satan to act. This constitutes sin.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찌하여 노아의 나체(裸體)로써 함을 시험하셨던가 하는 것이다. 방주(方舟)는 천주(天宙)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 40일로써 방주를 뜻 가운데 세운 직후에 되어진 모든 사실들은 천주창조(天宙創造) 이후에 되어지는 모든 사실들을 상징한 것이었다 함은 이미 논술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40일 심판이 끝난 직후의 노아의 입장은 천지창조 후의 아담의 입장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Next, let us examine why God tested Ham by having him behold Noah’s nakedness. We saw that the ark symbolized the cosmos, and that the events occurring immediately after the dispensation of the ark represented the events which took place immediately after the creation of the cosmos. Hence, Noah’s position right after the flood was much like that of Adam after the creation of heaven and earth.
창조된 아담과 해와가 서로 얼마나 가깝고 허물할 것이 없는 사이였으며, 또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었던가 하는 것은, 창세기 2장 25절에 그들이 서로 나체로 있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墮落)한 후에 스스로 하체(下體)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나뭇잎으로 가렸었고, 또 하나님이 보실 것을 두려워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었다(창 3 : 7). 그러므로 그들이 하체를 부끄러워했던 행위는 하체로 범죄하여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다는 정념(情念)의 표시요, 하체를 가리고 숨었던 행동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범죄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Adam and Evebefore the Fall were close in heart and innocently open with each other and with God; as it is written, they were not ashamed of their nakedness (Gen. 2:25). Yet after they fell, they felt ashamed of their nakedness. They covered their lower parts with fig leaves and hid among the trees of the garden, fearing that God would see them (Gen. 3:7-8). This shame was an indication of their inner reality, for they had formed a bond of blood ties with Satan by committing sin with their sexual parts. By covering their lower parts and hiding, they expressed their guilty consciences, which made them feel ashamed to come before God.
40일 심판으로 사탄을 분립(分立)한 입장에 있었던 노아는 천지창조 직후의 아담의 입장에 섰어야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나체(裸體)로 있어도 그 가족들이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 숨으려 하지도 않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으로써, 일찍이 죄를 짓기 전 어디도 가린 데 없이 드러낸 나체 그대로의 인간을 보시면서 기뻐하셨던 그 심정을 탕감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노아로 하여금 나체로 누워 있게 하셨었다. 따라서 함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같은 심정(心情)으로 아무 부끄러움 없이 노아를 대했어야 노아와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뜻 가운데서 죄짓기 전 부끄러움을 몰랐던 아담가정의 입장으로 복귀하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Noah, who had severed his ties to Satan through the forty-day flood judgment, was supposed to secure the position of Adam right after the creation of the universe. God expected that the members of Noah’s family would react to Noah’s nakedness without any feelings of shame and without any thought to conceal his body. God wanted to recover the joyful heart which He had felt when looking at Adam and Eve in their innocence before the Fall by taking delight in the innocence of Noah’s family. To fulfill such a profound wish, God had Noah lie naked. Had Ham been one in heart with Noah, regarding him with the same heart and from the same standpoint as God, he would have looked upon his father’s nakedness without any sense of shame. He thus would have fulfilled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in Noah’s family the state of Adam and Eve’s innocence before the Fall.
그러나 노아의 아들들은 이와 반대로 그 부친의 나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이를 가렸으므로, 이로써 그들은 타락 후의 아담가정과 같이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은 부끄러운 몸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증(自證)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까마귀로써 보여 주신 것과 같이, 노아가정에 침범할 수 있는 무슨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던 사탄은 자기의 혈연적인 후손임을 자증하고 나선 노아의 아들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가정에 다시 침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We can thus understand that when Noah’s sons felt ashamed of their father’s nakedness and covered his body, it was tantamount to acknowledging that they, like Adam’s family after the Fall, had formed a shameful bond of kinship with Satan and were thus unworthy to come before God. Satan, like the raven hovering over the water, was looking for a condition to invade Noah’s family. He attacked the family by taking Noah’s sons as his object partners when they in effect acknowledged that they were of his lineage.
이와 같이 함이 그 부친의 나체를 부끄러워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 행동은 범죄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함은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룰 수 없었으므로,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When Ham felt ashamed of his father’s nakedness and acted to cover it up, he made a condition for Satan to enter; hence his feeling and act constituted a sin. Consequently, Ham could not restore through indemnity the position of Abel from which to make the substantial offering. Since he could not establish the foundation of substance,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in Noah’s family ended in failure.
그러면 나체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죄가 되는가? 노아는 아담의 대신으로서 아담으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한 모든 조건들을 제거해야 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정은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다는 감성과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써,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기 전 아담가정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 것으로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아담가정 대신으로 세워졌던 노아가정만이 세워야 할 조건이었던 것이다.
Is it always sinful to regard nakedness with a sense of shame? No. Noah’s was a special case. In the position of Adam, Noah had the mission to remove all of Adam’s conditions which had left him vulnerable to Satan’s attack. By demonstrating that they neither felt ashamed of Noah’s nakedness nor would attempt to cover it, Noah’s family would have fulfilled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the position of Adam’s family in its original innocence before it had joined with Satan in a kinship of blood. Therefore, this was an indemnity condition which only Noah’s family was required to fulfill.
2.3 Some Lessons from Noah’s Family
노아가 120년 간이나 걸려서 산꼭대기에다 배를 지었던 것은 누구나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비난과 조소를 받은 그 일로 말미암아서 노아가정이 구원(救援)을 받았다는 사실은 함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함은 설혹 노아가 나체로 누워 있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을 좋게만 볼 수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은 자기를 중심하고 하늘 앞에 선 노아를 비판하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표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으로부터 1600년이나 지나 40일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행사하심으로써 찾아 세우셨던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늘 가는 길은 겸허(謙虛)와 순종(順從)과 인내(忍耐)를 요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It is difficult for anyone to understand how Noah persisted in building the ark on the mountain over 120 long years, all the while enduring harsh criticism and ridicule. Ham knew well that his family had been saved by his father’s labors. Considering these things, Ham should have had such respect for his father that he would overcome his personal offense at Noah’s nakedness and have some understanding of it. Yet instead of trusting Noah, who had been justified by Heaven, Ham criticized him from a self-centered perspective and showed his displeasure by his actions. His disrespect had the effect of frustrating God’s long labors to work His providence through Noah’s family. We, too, need humility, obedience and patience to walk the path toward Heaven.
다음으로 또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뜻 성사(成事)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분담(責任分擔) 수행 여부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다. 노아가정은 하나님이 1600년이나 걸려 찾아오셨고, 또 노아가 방주(方舟)를 짓기까지 120년이나 이끌어 오셨으며, 뿐만 아니라 40일의 홍수(洪水)로써 전인류를 희생시키면 서까지 세우신 가정이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함의 작은 실수로 말미암아서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대상이었던 그 가정 전부를 아낌없이 쓸어 버리시어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Next, the providence in Noah’s family teaches us about God’s conditional predestination of the fulfillment of His Will and His respect for the human portion of responsibility. God found Noah’s family after sixteen hundred years of preparation. He guided Noah for 120 years while he constructed the ark and raised up his family at the cost of sacrificing the rest of humanity in the flood. However, even though they had been His beloved in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when Ham made his seemingly small mistake, allowing Satan to taint them, the entire Will centering on Noah’s family came to naught.
다음으로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노아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려고 오랜 기간을 두고 애써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이 일단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를 아낌없이 버리시고 그 대신 아브라함을 택하셨던 사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Finally, the providence through Noah’s family teaches us about God’s conditional predestination of human beings. Despite the fact that God had striven arduously for a long time to find Noah and raise him up as the father of faith, when his family could not fulfill its responsibility, God, though regretful, did not hesitate to abandon him and choose Abraham in his pl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