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tion 2. The Second Coming of Elijah and John the Bap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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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재림(再臨)하리라는 것은 이미 말라기 선지(先知)가 예언했던 바였고(말 4 : 5), 세례 요한이 바로 재림엘리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증언이었다(마 17 : 13, 마 11 : 14). 그러나 세례 요한엘리야재림자(再臨者)였다는 사실은 일반 유대인은 물론 세례 요한 자신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요 1 : 21), 이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의혹(마 11 : 3)과 그에 따르는 유대인들의 불신은 날로 더하여지게 되어, 마침내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The prophet Malachi foretold that Elijah would come again: “Behold, I will send you Elijah the prophet before the great and terrible day of the Lord comes” (Mal. 4:5). Jesus testified that the prophesied coming of Elijah was realized in none other than John the Baptist: “I tell you that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did not know him, but did to him whatever they pleased. . . .” Then the disciples understood that he was speaking to them of John the Baptist (Matt. 17:12-13). Nevertheless, John the Baptist did not recognize himself to be the second coming of Elijah (John 1:21), and neither did the Jewish people. John’s ignorance reinforced his doubts about Jesus (Matt. 11:3). Since many Jewish people esteemed John the Baptist, they respected John’s point of view. This exacerbated their disbelief in Jesus. John’s ignorance was a major factor in compelling Jesus to go the way of the cross.

The Second Coming of Elijah and John the Baptist

Ⅰ. 엘리야재림중심한 유대인들의 심적 동향

2.1 The Jewish Belief in the Return of Elijah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에 있어서 솔로몬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성전이상(聖殿理想)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성전이상을 다시 찾아 세워 실체성전메시아를 맞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4대선지(四大先知)와 12소선지(十二小先知)를 보내시어 사탄 분립역사를 하셨다. 또 하나님께서 특별선지(特別先知) 엘리야를 보내시어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케 하여 바알신을 멸하신 것도 이러한 이상실현(理想實現)의 뜻을 가로막는 사탄을 멸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의 천적인 사명을 다 이루지 못하고 승천(昇天)하였기 때문에(왕하 2 : 11),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사탄분립해 가는 노정에 다시 사탄이 횡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실체성전이상이루어지기 위하여는, 이에 앞서 엘리야지상에서 다 이루지 못하고 간 사탄 분립의 사명을 계승 완수하게 하는 섭리가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러한 섭리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선지자(先知者) 말라기엘리야재림해야 할 것을 예언했던 것이다(말 4 : 5).

During the period of the united kingdom, God’s ideal for His holy Temple was thwarted by Satan through the transgressions of King Solomon (cf. Parallels 3). To restore the Temple and pave the way for the advent of the Messiah – who is the incarnation of the Temple – God sent four major and twelve minor prophets to Israel and worked through them to purify Israel of all satanic influences. Besides these, God sent the prophet Elijah to confront the prophets of Baal on Mt. Carmel; he defeated them with the power of God and cast down their altars to Baal. However, Elijah ascended to heaven in a whirlwind and a fiery chariot (II Kings 2:11) before he could complete his divine mission. Satan’s power revived and continued to plague God’s providence. The way of the Messiah could not be made straight until Satan’s influence was removed. Hence, before Jesus could realize the ideal of the incarnate Temple, another prophet should inherit and complete Elijah’s unfinished mission of breaking people’s ties with Satan. Due to this providential necessity, the prophet Malachi foretold that Elijah would come again (Mal. 4:5).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고 있던 유대인들의 간곡한 소망은 물론 메시아강림(降臨)이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유대인들이 갈망해 왔던 것은 엘리야재림(再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말라기 선지를 통하여 메시아강림에 앞서 그의 앞길을 예비하게 하시기 위하여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마고 분명히 약속하셨었기 때문이다(말 4 : 5). 그런데 엘리야는 이미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900여년 전에 승천선지자로서(왕하 2 : 11), 그는 분명히 영계(靈界)에 있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인 사실이 있다(눅 9 : 31). 이와 같이 되어 유대민족하늘에 머물고 있는 엘리야가 다시 올 때에는 전에 승천하던 모양으로 반드시 하늘로부터 내려오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오늘날의 기독교 신도들이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리라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듯이,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엘리야가 다시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The Jewish people who believed in the prophecies of Scripture fervently hoped for the advent of the Messiah. Yet we should know that they longed just as eagerly for the return of Elijah. This was because God had clearly promised through the prophet Malachi that He would send the prophet Elijah prior to the advent of the Messiah to prepare the way of the Lord. Elijah had ascended to heaven about 850 years before the birth of Jesus; since then he has abided in the spirit world. We are familiar with the story of the Transfiguration, when Elijah and Moses spiritually appeared before the disciples of Jesus (Luke 9:28-36). Many Jews believed that when Elijah came again he would descend from heaven in the same manner as he had ascended to heaven. Just as there are Christians today who are resolutely looking to the sky with the expectation that Jesus will come in the clouds, Jews of Jesus’ day were looking up at the sky, anxiously awaiting the coming of Elijah.

그런데 선지자 말라기예언대로 엘리야가 다시 왔다는 소식은 없고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메시아를 자처하고 나섰을 때, 예루살렘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7장 10절을 보면,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만일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그보다 먼저 오기로 약속되어 있는(말 4 : 5) 엘리야는 어디 와 있는가 하는 공박(攻駁)을 받게 되었다. 제자들은 그 답변에 궁하여 예수님께 직접 문의한 결과(마 17 : 10), 예수님은 바로 세례 요한이 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고 대답해 주셨다(마 11 : 14, 마 17 : 13).

Nevertheless, before any news was heard about Elijah having come again to fulfill Malachi’s prophecy, Jesus suddenly appeared and claimed to be the Messiah. It is no wonder that Jesus’ appearance and proclamation stirred up all of Jerusalem in great confusion. Wherever Jesus’ disciples went, they were bombarded with the question about Elijah, who was supposed to come first. Lacking an adequate answer themselves, the disciples turned to Jesus asking, “Then why do the scribes say that first Elijah must come?” (Matt. 17:10). Jesus replied that John the Baptist was the very Elijah whom the people were awaiting (Matt. 17:12-13).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겠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있는 다른 유대인들이야 어떻게 예수님의 이러한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인가? 예수자신유대인들이 자기의 증언을 즐겨 받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 : 1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Since the disciples already believed that Jesus was the Messiah, they willingly accepted his testimony that John the Baptist was Elijah. Yet how could others who did not know Jesus accept this controversial claim? Jesus himself expected that they would not readily believe it, and hence he said, “If you are willing to accept it, he is Elijah who is to come” (Matt. 11:14).

The Jewish Belief in the Return of Elijah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더욱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요한복음 1장 21절의 기록에 보이는 바 이미 세례 요한 자신자기엘리야가 아니라고 명백히 부인한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What made it even more difficult for the Jewish people to believe in Jesus’ proclamation was the earlier denial by John the Baptist. John had insisted he was not Elijah: “And they asked him, ‘What then? Are you Elijah?’ He said, ‘I am not’” (John 1:21).

Ⅱ. 유대민족의 갈 길

2.2 The Direction the Jewish People Would Choose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서 그가 바로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 하셨고(마 11 : 14), 이와 반대로 장본인인 세례 요한 자신은 이미 이 사실을 부인하여 버렸으니 유대민족누구의 말을 곧이듣고 따라갈 수 있었을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 두 분 가운데서 누가 더 믿을 수 있는 인물로 비쳐졌던가 하는 데 따라서 좌우문제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Jesus made it plain that John the Baptist was the very Elijah whom the people were so anxiously awaiting, while on the contrary, John the Baptist himself flatly negated this claim. Whose words were the Jewish people to believe? This matter obviously depended on which of the two, Jesus or John, appeared more credible and respectable in the eyes of the people of that time.

그러면 그러면 먼저 당시 유대민족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것으로 보여졌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Let us examine how Jesus must have appeared to the Jewish people.

예수님은 빈천(貧賤)한 목수(木手)의 가정에서 생장(生長)한 하나의 배우지 못한 청년이었다. 이러한 청년이 이름 없이 일어나 스스로 안식일(安息日)의 주인이라 칭하면서 유대인들이 생명과 같이 여기는 안식일을 범하였다(마 12 : 1∼8).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구원의 푯대인 율법(律法)을 폐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마 5 : 17).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지도자들에게 몰린 바 되어 하는 수 없이 어부(漁夫)를 불러 제자를 삼았으며 세리(稅吏)와 창기(娼妓)와 죄인(罪人)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셨다(마 11 : 19).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유대인지도자들보다도 세리들과 창기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마 21 : 31) 주장하셨던 것이다.

Jesus was an uneducated young man who grew up in the poor and lowly home of a carpenter. This unknown young man suddenly appeared and called himself the “Lord of the Sabbath” while apparently defiling the Sabbath, which pious Jews kept with utmost reverence (Matt. 12:1-8). Jesus thus gained the reputation of one who wanted to abolish the Law, which for the Jews was the basis of salvation (Matt. 5:17). Therefore, the leaders of the Jewish community persecuted Jesus. Jesus was compelled to gather disciples from among simple fishermen and to befriend tax collectors, prostitutes and sinners, with whom he would eat and drink (Matt. 11:19). Even worse from the standpoint of the Jewish leaders, Jesus asserted that the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would enter the Kingdom of Heaven ahead of them (Matt. 21:31).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씻은 후에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값진 기름을 부은 일이 있었다(눅 7 : 37∼38). 이러한 행동은 오늘날의 사회있어서도 용납(容納)되기 어려운 일이어든, 하물며 음행(淫行)하는 여인을 돌로 쳐 죽여도 말 못 하던 유대인의 엄격한 윤리사회(倫理社會)에 있어어떻게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용납하셨을 뿐 아니라, 여인의 태도를 비난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도리어 그 여인을 칭찬하셨던 것이다(눅 7 : 44∼50, 마 26 : 7∼13).

On one occasion, a prostitute came to Jesus, weeping, and began to wet his feet with her tears, wipe them with her hair, kiss them, and anoint them with a flask of precious ointment (Luke 7:37-38). To accept such ministrations from a prostitute would be unseemly even in modern society; it was surely scandalous in Jewish society, with its austere ethical code wherein an adulterous woman would have been stoned to death. Yet Jesus not only approved of her lavish attendance; he even praised her and chastised his disciples when they rebuked the woman (Luke 7:44-50).

한편 또 예수님은 자기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세우시고(요 14 : 9), 자기로 말미암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주장하시면서(요 14 : 6), 자기를 그들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무엇보다도 더 사랑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마 10 : 37, 눅 14 : 26). 예수님의 모습이 이러하였으므로, 유대인지도자들은 그를 마귀의 왕 바알세불이 접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조소(嘲笑)하였던 것이다(마 12 : 24).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전후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결코 믿겨운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Moreover, Jesus seemed to place himself on an equal footing with God (John 14:9) and asserted that no one could enter God’s Kingdom except through him (John 14:6). He insisted that people should love him more than they love their own parents, brothers and sisters, spouses or children (Matt. 10:37), (Luke 14:26). Thus, to many, Jesus’ words and deeds appeared blasphemous. Hence,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 Jewish leadership rebuked and mocked him, accusing him of being one possessed by Beelzebul, the prince of demons (Matt. 12:24). From all this, we can gather that Jesus was far from credible in the eyes of the Jewish people of his time.

다음으로 우리는 당시의 유대민족입장에서 본 세례 요한의 모습은 어떠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How did John the Baptist appear to the Jewish people of that time?

세례 요한은 당시의 명문가인 제사장(祭司長)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다(눅 1 : 13). 그의 부친지성소(至聖所)에서 분향할 때에 그 아내가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말을 곧이듣지 아니함으로써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출생하자마자 그 입이 열린 기사이적(奇事異蹟) 등으로 인하여 온 유대 고을 사람들이 크게 놀랐던 것이다(눅 1 : 9∼66). 뿐만 아니라 광야(曠野)에서 메뚜기와 석청(石淸)으로 연명하면서 수도(修道)하던 그의 빛나는 신앙생활을 보고, 일반 유대인들은 물론 제사장들까지도 그에게 혹 당신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물어 볼 정도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훌륭하게 보였던 것이다(눅 3 : 15, 요 1 : 20).

John the Baptist was born to a prominent family; he was the son of Zechariah, a priest. The miracles and signs surrounding John’s conception and birth surprised all the hill country of Judea. One day, when Zechariah was burning incense in the Temple, an angel appeared before him and announced that his wife, who was old and barren, would soon conceive a son. When he did not believe the angel’s words, he was struck dumb, and his tongue was loosed only upon the birth of the child (Luke 1:9-66). Furthermore, John led an exemplary life of faith and discipline in the wilderness, surviving on locusts and wild honey. For these reasons, many Jewish people wondered whether perhaps he was the Christ, and a delegation of priests and Levites came to him and asked him this directly (Luke 3:15), (John 1:20). The Jewish people respected John to this extent.

위에서 밝힌 바 그 당시의 사정을 놓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세례 요한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 과연 그들이 누구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것이 세례 요한의 말이었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보다도 자기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한 세례 요한의 말을 더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의 말을 믿게 되자, 예수님의 이 증언은 메시아로 자처하기 위한 일종의 위증(僞證)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연히 망언자(妄言者)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Considering these circumstances, when the Jewish people of Jesus’ day compared Jesus and John the Baptist, who appeared more credible to them? Without a doubt, John’s words had more credibility. Therefore, they naturally believed John the Baptist when he denied being Elijah more than they believed Jesus’ testimony that John was Elijah. Since the people believed John, they considered Jesus’ words to be a fabrication concocted to support his dubious claim to be the Messiah. Consequently, Jesus was condemned as an impostor.

The Direction the Jewish People Would Choose

이와 같이 예수님이 망언자로 몰리게 될 때,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가 유대인들에게 있어 거리끼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불신의 도는 점점 더 높아지기만 하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고 세례 요한의 말을 믿고 보니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메시아가 오셨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Once Jesus was condemned as an impostor, the people’s disbelief in him intensified daily. They found his deeds and words more and more offensive. Since they believed John’s words over Jesus’ words, they could only think that Elijah had not yet come. Accordingly, they could not even imagine that the Messiah had already come.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말라기예언(豫言)을 믿는 입장에 서면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아로 자처하는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 입장에 서면 엘리야가 온 다음에야 메시아가 오시리라고 예언성경을 버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다. 거기에서 도저히 하나님예언을 저버릴 수는 없었던 유대인들은 부득이 예수님을 불신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As long as the Jewish people kept their faith in the prophecy of Malachi, they had to reject Jesus, who claimed to be the Messiah, because from their viewpoint Elijah had not yet come. On the other hand, to believe in Jesus they would have had to deny the biblical prophecy which asserted that the Messiah would come only after the return of Elijah. Since pious Jews would not even consider denying the prophecies of Scripture, they were left with no other choice but to disbelieve in Jesus.

Ⅲ. 세례 요한의 불신

2.3 The Faithlessness of John the Baptist

위에서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당시의 제사장(祭司長)이나 전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을 숭경(崇敬)하던 마음은 그를 메시아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눅 3 : 15, 요 1 : 20). 따라서 만일 세례 요한자기가 바로 예수님이 증언하신 그대로의 엘리야라는 것을 선포하고 나섰더라면,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엘리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전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믿게 되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끝내 자기엘리야가 아니라고 주장한 세례 요한하나님섭리에 대한 무지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Many among the Jewish leadership and people of Jesus’ day had the highest respect for John the Baptist; some even thought of him as the Messiah. Had John the Baptist announced that he was Elijah, as Jesus had testified, those who were eagerly waiting for the Messiah would have readily believed John’s testimony and flocked to Jesus. Instead, John’s ignorance of God’s providence, which led him to insist that he was not Elijah, became the principal reason why the Jewish people did not come to Jesus.

 The Faithlessness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은 일찍이 자기는 물로 세례(洗禮)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예수님)는 불과 성령(聖靈)으로 세례를 주시기 때문에 자기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증거하였다(마 3 : 11).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장 33절을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하나님)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그리스도)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고 한 세례 요한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례 요한에게 직접 교시(敎示)하셨고, 세례 요한 자신도 또 그렇게 증거하였으며, 한편 요한복음 1장 23절을 보면 자기는 그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까지 말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3장 28절에는 자신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언명(言明)한 기록이 있다.

John the Baptist testified to Jesus at the Jordan River: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he who is coming after me is mightier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Matt. 3:11). I myself did not know him; but he who sent me to baptize with water said to me, “He on whom you see the Spirit descend and remain, this is he who baptizes with the Holy Spirit.” And I have seen and have borne witness that this is the Son of God (John 1:33-34). God had directly revealed to John that Jesus was the Messiah, and John bore witness to this revelation. Moreover, he said,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Make straight the way of the Lord’” (John 1:23), and declared that he was the one who had been sent before the Christ (John 3:28).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응당 자기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의 지혜로써도 알았어야 할 것이었다. 설혹 세례 요한이 그 사실을 미처 자각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하늘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받아 알고 있는 위에(요 1 : 33∼34) 예수님이 친히 자기엘리야라고 증언하셨으니, 자기도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바로 엘리야라고 하는 것을 뒤늦게라도 선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 앞에 무지하여(마 11 : 19) 이미 예수님의 증언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요 1 : 21) 그 후에도 섭리방향과 길을 달리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세례 요한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이나 또 이렇듯 난처한 입장에 놓인 예수님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서러우셨을 것인가!

Therefore, John should have realized through his own wisdom that he was the returning Elijah. Even if John did not realize this fact, since God had revealed to him that Jesus was the Messiah, he should have accepted the testimony of Jesus and, in obedience, proclaimed himself to be Elijah. However, John was ignorant of God’s Will. He negated Jesus’ testimony concerning him; moreover, he separated from Jesus and went his own way. We can imagine how sorrowful Jesus must have been as these events unfolded. How sorrowful must God have felt as He looked upon His Son in such a difficult situation.

사실상 세례 요한예수님에게 세례(洗禮)를 주고 그를 증거함으로써 그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은 다 끝난 것이었다. 그러면 그 후에 있어서의 그의 사명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In truth, John the Baptist’s mission as a witness ended when he baptized Jesus and testified to him. What should his mission have been after that point?

그의 부친 사가랴는 성령(聖靈)에 감동되어 아직 복중(腹中)에 있었던 세례 요한을 두고서,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눅 1 : 75)고 그의 사명을 분명히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예수님을 증거한 후에는 그 앞에 하나제자입장에서 그를 모시고 섬겨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예수님과 분리되어서 따로 세례를 주고 다녔기 때문에 누가복음 3장 15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도리세례 요한메시아로 혼동하였고, 한편 또 요한복음 1장 20절을 보면 제사장까지도 그렇게 혼동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세례 요한제자가 서로 자기의 선생이 세례를 많이 준다고 결례(潔禮)를 중심하고 싸운 일까지 있었다(요 3 : 25).

At the time of John’s birth, his father Zechariah, filled with the Holy Spirit, had prophesied concerning the mission of his son to serve the Messiah, saying: “grant us that we . . . might serve him without fear, in holiness and righteousness before him all the days of our life” (Luke 1:74-75). In this light, after John the Baptist bore witness to Jesus, he more than anyone, should have served Jesus with ardent devotion as a disciple for the rest of his life. However, John left Jesus and went about baptizing independently. It is no wonder that the Jewish people were confused to the point of even supposing that John was the Messiah (Luke 3:15). Their leaders were confused, too (John 1:19-20). What is more, in one incident, a Jew who followed Jesus and the disciples of John the Baptist quarreled with each other over whose teacher was giving more baptisms (John 3:25-26).

그리고 요한복음 3장 30절에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는 예수님과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운명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전적으로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입장에 섰었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흥(興)할 때에 그가 쇠(衰)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상 예수님의 복음(福音)은 누구보다도 먼저 세례 요한 자신이 전해야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지로 인하여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야 할 그의 목숨마저 별로 가치도 없는 일에 희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We can also discern from John’s statement,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John 3:30), that in his heart John did not regard himself as sharing the same destiny as Jesus. If John the Baptist and Jesus were walking side by side and sharing the same destiny, how then could John ever decrease as Jesus was increasing? Indeed, John the Baptist should have been Jesus’ foremost apostle, zealously proclaiming the Gospel of Jesus. Yet, due to his blindness, he did not fulfill his mission. His precious life, which was meant to be offered for Jesus’ sake, was eventually lost over a relatively insignificant affair (Mark 6:14-29).

세례 요한은 그 중심하늘편에 있었을 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영적역사(役事)가 끊어지고 인간 세례 요한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의 무지는 더욱더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자기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례 요한특히 옥중(獄中)에 들어가게 된 후부터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언행(言行)은 인간 세례 요한의 눈에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도 역시 엘리야가 오기 전에 나타예수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 : 3) 하고 질문하여 그 의심을 풀어 보려 하였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3절 내지 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분개심에 격한 경고의 내용을 가지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When the mind of John the Baptist was focused on God, he recognized Jesus as the Messiah and testified to him. Later, when the inspiration left him and he returned to a mundane state, his ignorance returned and exacerbated his faithlessness. Unable to acknowledge that he was the return of Elijah, John began to regard Jesus in the same disbelieving way as other Jews viewed him, particularly after he was imprisoned. Jesus’ every word and deed seemed to him only strange and perplexing. At one point, John tried to resolve his doubts by sending his disciples to Jesus, asking, “Are you he who is to come, or shall we look for another?” (Matt. 11:3). When Jesus was confronted with this question from John, he answered indignantly, with an air of admonition: Go and tell John what you hear and see: the blind receive their sight and the lame walk, lepers are cleansed and the deaf hear, and the dead are raised up, and the poor have good news preached to them. And blessed is he who takes no offense at me (Matt. 11:4-6).

세례 요한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복중(腹中)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눅 1 : 75), 그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고난어린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노정(公生涯路程)을 출발하실 때에 하늘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것을 증거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늘의 은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자기가 바로 메시아라는 대답을 하시지는 않았다. 그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 : 4∼5)고 완곡한 대답을 하셨다. 물론 세례 요한예수님의 이러한 기사와 이적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와 같이 구구하게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상기케 하심으로써 자기누구시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

John the Baptist had been chosen while still inside the womb for the mission of attending Jesus. He led an arduous, ascetic life in the wilderness, building his ministry in order to prepare the way for the coming Messiah. When Jesus began his public ministry, God revealed the identity of Jesus to John before anyone else and inspired John to bear witness to him as the Son of God. Yet John did not properly receive the grace that Heaven had bestowed on him. Therefore, when confronted with John’s doubting question, Jesus did not answer explicitly that he was the Messiah; he instead answered in this circuitous way. Certainly, John the Baptist must have known about Jesus’ miracles and signs. Despite this, Jesus gave a veiled answer, reminding John of the works that he was doing, with the hope of awakening him to his true identity.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마 11 : 5) 하신 말씀에는, 세례 요한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예수님의 비감한 심정이 어리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선민(選民)으로 부름을 받았던 유대 민족, 그중에서도 특히 세례 요한하늘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부요(富饒)한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예수님은 부득이 갈릴리 바닷가를 헤매시고 사마리아 땅을 두루 도시면서 가난한 자 가운데서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찾으셨던 것이다.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어부들과 세리와 창녀들은 모두 이처럼 가난한 자들이었다.

We should understand that when Jesus said, “the poor have good news preached to them,” he was expressing his deep sorrow over the disbelief of John the Baptist and the Jewish leadership. The prepared Jews, and John the Baptist in particular, were the rich people who had been blessed with an abundant wealth of God’s love. Yet because they all rejected Jesus, he had to roam the seacoast of Galilee and the region of Samaria to search among the “poor” for those who would listen to the Gospel. These poor ones were uneducated fishermen,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사실상 예수님이 찾고자 하셨던 제자들은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다.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하러 오신 예수님이었으니 그에게는 따라 다니는 천 명보다도 먼저 천 명을 영도(領導)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이 예비한 능력 있는 무리들을 찾으시려고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 제사장(祭司長)과 교법사(敎法師)들에게 복음말씀을 전하시지 않았던가!

The disciples whom Jesus would have preferred to find were not such as these. Since Jesus came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he was more in need of one leader who could guide a thousand than a thousand who would follow a leader. Did he not first preach the Gospel to the priests and scribes in the Temple? He went there in search of prepared and capable people.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비한 잔치에 청함을 받은 객들은 하나도 응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거리에 나가 방황하는 거지떼를 불러 모아야만 하셨다. 이처럼 불청객(不請客)들을 맞으러 나선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은 드디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 : 6)라고 하는 심판(審判)의 말씀을 토하시고 말았다.

Nonetheless, as Jesus indicated in a parable, because the guests who were invited to the banquet did not come, he had to roam the streets and byways to gather the poor and maimed, the blind and lame (Luke 14:16-24). Faced with the miserable situation of having to offer the riches of his banquet to the uninvited outcasts of society, Jesus expressed his sorrow in these words of judgment: “Blessed is he who takes no offense at me” (Matt. 11:6).

세례 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혹은 메시아, 혹은 엘리야, 혹은 선지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눅 3 : 15, 요 1 : 20∼21).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자기(예수)로 인하여 실족(失足)하면 무슨 복이 있겠느냐고 하는 간접적인 표현을 통하여서 세례 요한운명심판하셨던 것이다.

Though John was greatly admired in his day, Jesus judged John’s life by saying obliquely that one who took offense at him would not be blessed, no matter how great he might be.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떠한 실족을 하였던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종신토록 예수님을 모시고 섬겨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John took offense and thus failed in his mission to attend Jesus devotedly for the whole of his life.

질문하러 왔던 세례 요한제자들이 떠나간 후에 예수님은, 사명적인 면에서 보아 세례 요한이 본시 가장 위대한 선지자(先知者)로 왔으나 이제 맡겨진 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 : 11)고 말씀하셨다.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일찍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지상생활을 거쳐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면 천국에서도 가장 큰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역사상 가장 큰 자로 지상에 태어난 세례 요한이 어찌하여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만도 못할 것인가?

After the disciples of John the Baptist finished questioning Jesus and left, Jesus remarked that although John may have been the greatest of all prophets, he failed to complete the mission God had entrusted to him: Truly, I say to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risen no 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yet he who is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is greater than he (Matt. 11:11). Everyone in heaven was born of woman and lived an earthly life. One would expect that since John was the greatest among all those born of women, he should also have been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Why was John less than even the least in the kingdom?

과거에 왔다 간 수많은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시간적인 먼 거리를 두고 간접적으로 이를 증거하였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메시아직접적으로 증거할 사명을 띠고 왔었던 것이다. 그러므로메시아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일진대, 증거적인 처지에서 보아, 메시아직접적으로 증거하는 세례 요한간접적으로 증거한 그 어떠한 선지자보다도 위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를 모신다는 점에서 볼 때에는 그는 가장 작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모시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가까이 모셔야 할 자리에 부름을 받은 세례 요한은(눅 1 : 75), 도리예수님과 엇갈린 길을 걷고 있었으니, 이로써 그는 천국의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Numerous prophets in the past had borne testimony to the Messiah indirectly, across the expanse of time. John, on the other hand, had the mission of testifying to the Messiah directly. If testifying to the Messiah was the main mission of the prophets, then John the Baptist was surely the greatest of prophets. Nevertheless, in terms of attending the Messiah, he was the least of all. Everyone in the kingdom of heaven, no matter how lowly, knew that Jesus was the Messiah and served him with devotion. Yet John the Baptist, who had been called upon to serve the Messiah more closely than anyone else, separated from Jesus and walked his own way. In terms of his devotion to Jesus, therefore, he was less than even the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다시 그 다음 절에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를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 광야에서 그렇게 어려운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하여 온 세례 요한예수님을 잘 모시기만 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시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수제자의 위(位)는 침노한 베드로에게 빼앗긴 바 되었다. 여기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고 시간적인 한계를 지은 것을 보면, 그 아래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일반인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세례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Jesus continue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Matt. 11:12). John the Baptist was chosen from before his birth and led an arduous ascetic life in the wilderness. Had he attended Jesus with a sincere heart, the position of Jesus’ chief disciple was surely reserved for him. However, because he failed in his mission to serve Jesus, Peter, a “forceful man,” laid hold of the position of chief disciple. We can deduce from the expression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at Jesus spoke the verses that follow (Matt. 11:16-19) in reference not primarily to the people in general but specifically to John the Baptist.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이 지혜가 있어서 지혜롭게 행동하였더라면 예수님의 무릎 밑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행적은 영원의(義)로서 남아질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그는 무지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어니와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마저 모두 막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Jesus concluded, “Wisdom is justified by her deeds” (Matt. 11:19). Had John acted wisely, he would not have left Jesus, and his deeds would have been remembered forever as righteousness. Unfortunately, he was foolish. He blocked the Jewish people’s path to Jesus, as well as his own path.

우리는 이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길을 가게 된 큰 요인이 세례 요한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또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8절에서,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여 세례 요한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이 지혜가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고 한탄한 사실을 볼 수 있다.

Here we have come to understand that the main reason why Jesus had to die on the cross was the failure of John the Baptist.

2.4 The Sense in Which John the Baptist Was Elijah

우리는 상술(上述)한 바(제2절 Ⅰ)에 의하여, 엘리야지상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계승 완성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누가복음 1장 17절에 기록된 대로, 엘리야심령(心靈)과 능력(能力)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義人)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기 위하여 출생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명적인 입장에서 엘리야재림자(再臨者)가 되는 것이다.

We have stated previously that John the Baptist was to inherit and complete the mission which Elijah had left unfinished on earth. As recorded in the Bible, he was born with the mission to go before the Lord, “in the spirit and power of Elijah, to turn the hearts of the fathers to the children, and the disobedient to the wisdom of the just, to make ready for the Lord a people prepared” (Luke 1:17). Hence, in terms of his mission, John was the second coming of Elijah.

이에 대하여 상세한 것은 부활론(復活論)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엘리야는 땅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재림하여 그가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그를 협조함으로써, 자기지상 육신생활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세례 요한육신을 세워 그를 통하여서 완수하려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엘리야육신을 대신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명을 중심하고 보면 그는 엘리야와 동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Furthermore, as will be discussed in greater detail (cf. Resurrection 2.3.2), Elijah in fact returned in spirit and was trying to help John the Baptist accomplish the mission which he himself had failed to complete during his earthly life. John the Baptist concurrently served as Elijah’s body, through whom Elijah worked to complete his mission. Therefore, in terms of their common mission, John may be seen as the same person as Elijah.

The Sense in Which John the Baptist Was Elijah

Ⅴ. 성서를 대하는 우리태도

2.5 Our Attitude toward the Bible

우리는 위에서 성서말씀에 의하여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무지와 불신은 유대인들의 불신을 초래하였고, 유대인들의 불신은 마침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十字架)의 길을 가시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천적(天的)인 비밀을 밝힌 사람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을 무조건 위대한 선지자라고 단정하는 입장에서만 성서를 보아 왔던 까닭이다.

We have learned that John the Baptist’s ignorance and disbelief in Jesus brought about the Jewish people’s disbelief, which eventually led to Jesus’ crucifixion. Until today, no one has ever uncovered this heavenly secret, because we have been reading the Bible based on the unquestioned belief that John the Baptist was a great prophet.

우리는 인습적인 신앙 관념과 구태(舊態)를 벗어 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고루한 신앙태도를 단연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세례 요한문제중심하고 배웠다. 사명을 다하고 간 세례 요한을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믿는 것도 부당하겠거니와, 사실상 사명을 다하지 못한 세례 요한을 잘못 알고 다한 것으로 믿는 것도 잘못된 신앙임에 틀림없다.

Our new insight into John the Baptist teaches us that we should dispense with the conservative attitude of faith which makes us afraid to question conventional beliefs and traditional doctrines. Would it not be an error to regard John as having failed in his mission if he actually succeeded? Likewise, it is certainly wrong to believe that John fulfilled his mission when in fact he did not.

우리신령면(神靈面)으로나 진리면(眞理面)으로나 항상 바른 신앙가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서말씀에 의하여 세례 요한의 진상을 밝혀 왔지만, 누구든지 영통(靈通)하여서 영계(靈界)에 있는 세례 요한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성도들은 여기에 기록된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We should constantly make effort to have the right faith by searching both in spirit and truth. Even though our discussion of John the Baptist has been based on an examination of the Bible, those who are able to communicate spiritually can see the condition of John the Baptist and confirm that the above revelation about John is entirely correct and true.

Our Attitude toward the B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