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다려 주세요!’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복귀섭리에 관한 명언
문선명, 한학자의 말씀 중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줄은 내려 줄 수 있어도, 떨어져 내려간 곳까지 직접 가서 끌어내 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려 준 종교의 줄을 잡고 스스로 힘을 다하여 매달려야 한다. 그것이 심정이다. 그 심정이 얼마나 간절하냐에 따라서 거리가 가까워질 것이다.
외적인 가치의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도 도의 절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선지선열(先知先烈)들을 세웠습니다.
지상에서는 아직도 도의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도 그 기준을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말씀시대나 실체시대는 대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심정시대는 대신이 없다.
선생님은 하루에 세 번 이상 눈물을 흘렸다. 눈물로 엮어진 역사이기에 눈물로 씻어야 한다.
고통의 사정을 알리고 싶지 않고 슬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늘은 덮어 내려오신 것이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 느꼈던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적 내연(內緣)을 능가해야 기쁨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생애를 바쳐 싸우고 죽었으니, 우리도 예수의 심정을 대신하여 증거하고 싸우며 죽는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에는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잃어버린 슬픔과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선지 선열들을 보내어 사탄과 싸우게 하신 역사적 슬픔이 있다.
예수께서 하늘의 애달픈 심정을 대신하여 서러워하던 것의 세 배 이상의 애달픈 마음을 가져라.
심정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것을 실생활에서 사무치게 느껴 생활하는 자가 아니면 타락성(墮落性)을 벗을 수 없다.
타락 이후 섭리해 오신 하나님과 인연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락 전의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축복은 편안한 자리에서 오지 않는다.
원수지간이지만 심정적 인연을 남긴 그러한 사람이 될 때는 역사를 되찾아 만날 수 있고 다시 살 수 있다.
단계적으로 탕감을 치르지 않으면 발전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모든 실수를 내 실수로 하여 회개하고 자복하지 않으면 역사적인 내정적 심정을 상속받을 수 없다.
‘너하고 나하고 같이 살고, 같이 말하고, 일하고 싶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이다.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싸움의 노정을 거쳐야 합니다. 싸움에 이기려면 패자가 맛보아야 하는 서러움을 먼저 느껴 원수에 대한 적개심을 가져야 합니다.
탕감복귀의 원칙은 철칙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반겨 맞으려 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