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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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1.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in Adam’s Family

타락(墮落)은 비록 인간 자신의 잘못으로 되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타락인간을 구원(救援)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데 대하여는 이미 전편 제3장 제2절 Ⅰ에서 논한 바 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 타락인간을 복귀(復歸)하시려는 섭리는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Even though the Fall resulted from human failure, God has felt responsible to save fallen humanity (cf. Messiah 2.1). Therefore, God immediately began His providence to restore fallen people by having Adam’s family lay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이미 서론(緖論)에서 논한 바와 같이, 아담은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中間位置)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중간 위치에 처해 있었던 타락인간(墮落人間)을 하늘편으로 분립(分立)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는 타락인간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아담가정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고, 그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Due to Adam’s kinship of blood with Satan, he was in the midway position, relating with both God and Satan (cf. Restoration 1.1). For a fallen person standing in the midway position to be purified, come to God’s side and establish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he must fulfill a condition of indemnity. Consequently, for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to be accomplished in Adam’s family, the members of his family had to make certain conditions of indemnity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faith and the foundation of substance. On these two foundations,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was to be established, and the Messiah could have come to Adam’s family.

제1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Ⅰ. 믿음의 기대

1.1 The Foundation of Faith

첫째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어떠한 조건물(條件物)이 있어야 한다. 원래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조건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진 타락한 아담이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가 믿음으로써 말씀 대신의 어떠한 조건물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세워야만 했던 것이다. 아담가정에서 세워야 했던 이 말씀 대신의 조건물은 제물(祭物)이었다.

To restore through indemnity the foundation of faith, fallen people must set up an object for the condition. Due to his faithlessness, Adam lost the Word of God, which had been given him in order to fulfill the condition necessary to establish the foundation of faith. He fell to the position where he could no longer receive the Word of God directly. Consequently, in restoring the foundation of faith, Adam had to faithfully offer in a manner acceptable to God some object for the condition, substituting for God’s Word. For Adam’s family, this object was a sacrificial offering.

둘째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 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 있어야 한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했던 중심인물은 물론 아담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응당 제물을 바쳐야 하였던 것이고, 그가 이 제물을 합당하게 바치는가 바치지 못하는가에 따라 ‘믿음의 기대’의 조성 여부가 결정될 것이었다.

To restore the foundation of faith, there must also be a central figure. One would expect that the central figure in Adam’s family be Adam himself. It would seem that Adam should have offered the sacrifice, and that whether or not he made the offering in an acceptable manner would have determined success or failure in laying the foundation of faith.

그러나 성서(聖書)의 기록을 보면, 아담이 제물을 바치지 못하고 가인과 아벨로부터 제물을 바쳤던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

Yet nowhere in the biblical record do we find Adam offering a sacrifice. Instead, his sons Cain and Abel offered them. What was the reason for this?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주인을 대하는 입장에 있는 존재를 상대로 하여 창조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제물을 대하신다면, 사탄도 또한 아담과 혈연관계(血緣關係)가 있음을 조건삼아 이것들을 대하려고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아담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을 대하는 비원리적(非原理的)인 입장에 서게 된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비원리적인 섭리를 하실 수 없으므로 선 악 두 성품의 모체가 된 아담을 선성품적(善性稟的)인 존재와 악성품적(惡性稟的)인 존재의 둘로 갈라 세우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담의 두 아들을 각각 선악(善惡)의 표시체로 분립시킨 후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대할 수 있는, 즉 한 주인 상대의 원리적인 입장에 세워 놓고 제각기 제물(祭物)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Creation, human beings were created to serve only one master (Matt. 6:24). God cannot conduct His providence in accord with the Principle with someone who serves two masters. If God were to accept Adam and his offering, Satan would use his ties of kinship with Adam as a condition through which to make a counter-claim upon him and his offering. In that case, Adam would be placed in the unprincipled situation of having to serve two masters: God and Satan. Since God could not conduct such an unprincipled providence, He took the course of symbolically dividing Adam, who embodied both good and evil, into two entities, one representing good and the other representing evil – an arrangement in line with the Principle. For this reason, God gave Adam two sons, representing good and evil, and set them in positions where each dealt with only one master, God or Satan. After setting up this arrangement, God had the two sons offer sacrifices separately.

그러면 가인과 아벨은 다 같이 아담의 자식인데 누구를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고, 또 누구를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야 할 것이었던가?

Cain and Abel were both sons of Adam. Which one of them was to represent goodness and relate with God, and which was to represent evil and interact with Satan?

가인과 아벨은 다 함께 해와의 타락의 열매였다. 따라서 타락의 모체(母體)인 해와의 타락 경로에 의하여서 그것이 결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해와의 타락은 두 가지의 불륜(不倫)한 사랑의 행동으로 인하여 성립되었었다. 즉 첫째 번은 천사장(天使長)과의 사랑으로 인한 영적 타락(靈的 墮落)이었으며, 둘째 번은 아담과의 사랑으로 인한 육적 타락(肉的 墮落)이었던 것이다.

Both Cain and Abel were the fruits of Eve’s fall; hence, their relative positions were determined according to its course. Eve’s fall was consummated through two different illicit love relationships. The first was the spiritual fall through her love with the Archangel. The second was the physical fall through her love with Adam.

물론 이것들은 모두 똑같은 타락행위(墮落行爲)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둘 가 운데서 어느 것이 보다 원리적이며 보다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를 가려 본다면, 첫째 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보다는 둘째 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번의 타락행위가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려고 한, 즉 때 아닌 때에 때의 것을 바라는 과분한 욕망이 동기가 되어(창 3 : 5) 비원리적 상대인 천사장과 관계를 맺었던 것임에 비하여, 둘째 번의 타락행위는 첫째 번의 행위가 불륜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편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심정이 동기가 되어, 아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원리적 상대인 아담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기 때문이다(전편 제2장 제2절 Ⅱ).

Certainly, the two relationships were both fallen acts. Yet between the two, the second act of love was more in line with the Principle and more forgivable than the first. Eve’s first fallen act was motivated by her excessive desire to enjoy what it was not yet time for her to enjoy and have her eyes opened, like God (Gen. 3:5). This desire led her to consummate a relationship of unprincipled sexual love with the Archangel. In comparison, Eve’s second fallen act was motivated by her heartfelt longing to return to God’s bosom after she realized that her first fallen relationship had been illicit. This desire led her to consummate a relationship with Adam, her intended spouse according to the Principle, even though God did not yet permit it (cf. Fall 2.2).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모두 해와의 불륜한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해와를 중심하고 맺어진 두 형의 불륜한 사랑의 행위들을 조건으로 가름하여 가인과 아벨을 각각 상이(相異)한 두 표시적 입장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가인은 사랑의 첫 열매이므로 그 첫째 번 것이었던 천사장(天使長)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표징(表徵)하는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고, 아벨은 사랑의 둘째 열매이므로 그 둘째 번 것이었던 아담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표징하는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던 것이다.

Cain and Abel were both fruits of Eve’s illicit love. God discriminated between them based on Eve’s two illicit acts of love and accordingly placed Cain and Abel in two opposing positions. In other words, since Cain was the first fruit of Eve’s love, signifying Eve’s first fallen act of love with the Archangel, he was chosen to represent evil. Therefore, he was in a position to relate with Satan. Since Abel was the second fruit of Eve’s love, signifying Eve’s second fallen act of love with Adam, he was chosen to represent goodness. Therefore, he was in a position to relate with God.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의 세계를 사탄이 먼저 점유하였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앞서 사탄이 먼저 비원리적인 입장에서 그 원리형(原理型)의 세계를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이 맏이를 세워서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계승시키려고 하셨던 원리적인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도 둘째 것에보다도 맏것에 대한 미련이 더욱 컸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사탄은 그때 이미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점유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보다 미련이 컸던 장자 가인을 먼저 취하려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탄이 미련을 갖고 대하는 가인보다도 아벨을 대하셨던 것이다.

For his part, Satan had seized control of the creation, which God had created by the Principle, and established an unprincipled world having only the outward form of God’s intended universe. In the original, principled world, God intended to raise up the eldest son and have him inherit the birthright. Therefore, Satan felt a stronger attachment to the elder son than he did to the younger. Since Satan had already claimed the universe, he vied with God for the elder son, Cain, who was more valuable to him. Because Satan had a strong attachment to Cain, God chose to deal with Abel.

이에 대한 실례를 우리는 성서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사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창 4 : 7)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보면 가인은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알수 있다.

The Bible attests to the discrimination between first- and second-born sons. For example, God said to Cain, “If you do not do well, sin is couching at the door” (Gen. 4:7). From this we may understand that Cain had a base to relate with Satan.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급시(出埃及時)에 애급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생축(牲畜)까지도 맏것은 모조리 쳤던 것이니(출 12 : 29), 그것들은 모두 가인의 입장으로서 사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는 차자 아벨의 입장이었던 레위의 손(孫)만이 법궤(法櫃)를 메고 갔었다(신 31 : 25).

When the Israelites were about to flee Egypt, God struck the firstborn of the Egyptians, even the firstborn of their livestock (Exod. 12:29), because the Egyptians, as Satan’s vassals, stood in the position of Cain. When the Israelites were returning to the land of Canaan, only the Levites, who were in the position of the younger son Abel, were allowed to carry the Ark of the Covenant (Num. 1:50-53); (Deut. 31:25).

그리고 창세기 25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직도 출생 전 복중의 태아(胎兒)들이었던 장자(長子) 에서를 미워하고 차자(次子)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장·차자라는 명분만으로써 그들은 이미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이 그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동시에 축복할 때에, 차자 에브라임을 우선적으로 축복하기 위하여 손을 엇바꾸어서 축복하였던 것도(창 48 : 14) 역시 에브라임이 아벨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It is written that God loved the second son Jacob and hated the first son Esau even while they were still inside their mother’s womb (Rom. 9:11-13). They were placed in the positions of Cain or Abel based solely upon the distinction of who was to be the firstborn son. When Jacob was blessing his two grandchildren, Ephraim and Manasseh, he crossed his hands and laid his right hand on the head of Ephraim, the second son in the position of Abel, to give him the first and greater blessing (Gen. 48:14).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서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한 주인으로서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아벨과 가인을 세워 놓고 제물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창 4 : 3∼5).

According to this principle, God placed Cain and Abel in a position where each could deal with only one master, and had them offer sacrifices (Gen. 4:3-5).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祭物)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가? 아벨은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히 11 : 4)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셨다(창 4 : 4). 그리하여 아담가정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타락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조건만 성립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容納)하신다는 것을 교시(敎示)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When Cain and Abel offered their sacrifices, “The Lord had regard for Abel and his offering, but for Cain and his offering he had no regard” (Gen. 4:4). Why did God accept Abel’s offering but reject Cain’s? God received Abel’s sacrifice because he stood in a proper relationship with God and made the offering in a manner acceptable to Him (Heb. 11:4). In this way, Abel successfully laid the foundation of faith in Adam’s family. He serves as an example that any fallen person can make an offering acceptable to God provided he satisfies the necessary conditions.

그리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 것은 가인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가인은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졌었으므로 하나님이 그 제물을 취하실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가인 자신이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것을 취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써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편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그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교시하신 것이다.

God did not reject Cain’s sacrifice because He hated him. Rather, because Cain stood in a position to relate with Satan which gave Satan rights over the sacrifice, God could not accept Cain’s sacrifice unless he first made some condition justifying its acceptance. The example of Cain shows that in order for a person who has a connection with Satan to return to God’s side, he must make a requisite indemnity condition.

그러면 가인은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였던가? 그것은 바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 조건’이었는데, 이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자세히 밝히기로 하겠다.

What indemnity condition should Cain have made? It was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믿음의 기대

Ⅱ. 실체기대

1.2 The Foundation of Substance

아담가정에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세워지기 위하여는, 가인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이 그의 헌제(獻祭)를 기뻐 받으실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어떻게 세워야 하였던가?

Had Cain fulfilled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God would have gladly accepted his sacrifice. The foundation of substance would then have been laid in Adam’s family. How should Cain have made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인간 시조(始祖)는 천사장(天使長)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어 그로부터 타락성(墮落性)을 계승하게 되었으므로, 타락인간이 그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탕감복귀원리(蕩減復歸原理)에 의하여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가지게 되었던 것과 반대의 경로를 취하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The first human ancestors fell by succumbing to the Archangel, from whom they inherited the fallen nature. To remove the fallen nature, a person must make an indemnity condition in accordance with the Principle of Restoration through Indemnity, by taking a course which reverses the process through which human beings initially acquired the fallen nature.

실체기대

천사장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던 아담을 사랑하지 못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사랑하여서 하나님의 입장과 같은 입장을 취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The Archangel fell because he did not love Adam; rather, he envied Adam, who was receiving more love from God than he. This was the cause of the first primary characteristic of the fallen nature: failing to take God’s standpoint. To remove this characteristic of the fallen nature, Cain, who stood in the Archangel’s position, should have taken God’s standpoint by loving Abel, who stood in Adam’s position.

그리고 천사장(天使長)이 하나님에게 더 가까웠던 아담을 중보(仲保)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아담의 위치를 취하려다가 타락되었기 때문에 ‘자기 위치를 떠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중보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The Archangel fell because he did not respect Adam as God’s mediator and did not receive God’s love through him; rather, he attempted to seize Adam’s position. This was the cause of the second primary characteristic of the fallen nature: leaving one’s proper position. To remove this characteristic of the fallen nature, Cain, who stood in the Archangel’s position, should have received God’s love through Abel, who stood in Adam’s position, respecting him as God’s mediator. In this way, Cain should have maintained his proper position.

그리고 천사장은 자기를 주관해야 할 인간, 즉 해와와 아담을 역주관(逆主管)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주관성을 전도(顚倒)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따라서 인간이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그의 주관을 받는 입장에 섬으로써 주관성의 법도(法度)를 바로 세워야 했던 것이다.

The Archangel fell when he claimed dominion over Eve and Adam, who were his rightful lords. This was the cause of the third primary characteristic of the fallen nature: reversing dominion. To remove this characteristic of the fallen nature, Cain, who stood in the Archangel’s position, should have obediently submitted to Abel, who stood in Adam’s position. By accepting Abel’s dominion, Cain should have rectified the order of dominion.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선한 뜻을 하나님은 아담에게 전하고, 아담은 또 해와에게 전하고, 해와는 다시 천사장에게 전하여 선을 번식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천사장은 따먹어도 좋다는 불의(不義)의 뜻을 해와에게 전했고, 또 해와는 그것을 아담에게 전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죄를 번식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서 있는 아벨의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여 아벨로부터 선의 뜻을 전해 받음으로써 선을 번식하는 입장을 조성해야 했던 것이다.

God told Adam not to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Adam should have conveyed this Will to Eve, who in turn should have conveyed it to the Archangel, thus multiplying goodness. Instead, the Archangel conveyed to Eve his evil will that it was permissible to eat of the fruit. Eve in turn conveyed this evil will to Adam and led him to fall. This was the cause of the fourth primary characteristic of the fallen nature: multiplying evil. To remove this characteristic of the fallen nature, Cain, who stood in the Archangel’s position, should have been receptive to the intentions of Abel, who stood closer to God, and learned God’s Will from him. Thus, Cain should have made a foundation to multiply goodness.

타락성본성을 가지게 된 경위

우리는 여기에서 가인 아벨의 헌제(獻祭)와 상통되는 몇 가지의 실례(實例)를 들어 보기로 하자.

There are many instances in human life which correspond to the situation of Cain and Abel.

우리의 개체를 두고 생각해 볼 때, 선을 지향하는 마음(롬 7 : 22)은 아벨의 입장이요, 죄의 법을 섬기는 몸(롬 7 : 25)은 가인의 입장인 것이다. 따라서 몸은 마음의 명령에 순종굴복(順從屈伏)해야만 우리 개체는 선화(善化)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이 마음의 명령에 반역(反逆)하여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은 입장을 반복하기 때문에 개체는 악화(惡化)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道)의 생활은 마치 아벨에게 가인이 순응해야 했듯이 하늘 뜻을 지향하는 마음의 명령에 몸을 순응케 하는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When we look within ourselves, we find that our innermost mind delights in the law of God (Rom. 7:22). It is in the position of Abel, while our body, which serves the law of sin (Rom. 7:25), is in the position of Cain. We can become good only if our body obediently follows our mind, which directs us toward goodness. All too often, however, our body rebels against the mind’s directions, repeating by analogy Cain’s murder of Abel. This is how evil grows within us. For this reason, the religious way of life requires that we make our body submit to the commands of our higher mind, just as Cain should have submitted to Abel and followed him.

타락성본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

그리고 인간은 타락(墮落)되어 만물보다도 거짓된(렘 17 : 9) 입장에 떨어졌으므로 만물을 아벨의 입장에 세워 놓고 그것을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헌제(獻祭)였다. 인간이 항상 좋은 지도자나 친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보다 하늘편에 가까운 아벨형의 존재를 찾아 그와 하나됨으로써 하늘 앞에 가까이 서고자 하는 천심(天心)에서 일어나는 행위인 것이다.

We can also see this in the practice of making offerings. Since we fell to the position of being “deceitful above all things” (Jer. 17:9), the things of creation stand in the position of Abel. Hence, through offering them we can go before God. To give another example, the universal tendency to seek out good leaders and righteous friends stems from our innermost desire to come before God through an Abel figure who is closer to God. By uniting with him, we can come closer to God ourselves.

그리고 온유겸손(溫柔謙遜)이 기독교 신앙의 강령이 된 것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기도 모르게 아벨형의 인물을 만나 그를 통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게 하기 위함이다. 개인에서부터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거기에는 반드시 가인과 아벨의 두 형의 존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든 것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가인형의 존재가 아벨형의 존재에게 순종굴복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인류가 그에게 순종굴복해야 할 아벨적인 존재로서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었다. 따라서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는 것이다(요 14 : 6).

The Christian faith teaches us to be meek and humble. By this way of life, we may meet our Abel figure and thus secure the way to go before God. In relationships at every level of society – from those between individuals to those at the level of families, communities, societies, nations and the world – we find that one party is in the role of Abel and the other is in the role of Cain. In order to restore society at each level to the state originally envisioned by God, those in the Cain position should respect and obey those in the Abel position. Jesus came to this world as the Abel figure to whom all of humanity should have submitted and followed. For this reason, he said, “no one comes to the Father, but by me” (John 14:6).

만일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더라면 그들은 이미 조성된 ‘믿음의 기대’ 위에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워, 이 두 기대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음으로써 창조본연의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하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천사장(天使長)이 인간을 타락케 하였던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반복하게 되어 아담가정이 세워야 했던 ‘실체기대’는 세워지지 않았다. 따라서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If Cain had yielded to Abel and thus fulfilled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in Adam’s family, they would have established the foundation of substance. Together with the foundation of faith already laid, Adam’s family would have established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The Messiah would then have come to them and restored the original four position foundation. Instead, Cain killed Abel. In murdering Abel, Cain repeated the sin of the Archangel. That is, he re-enacted the very process which had given rise to the primary characteristics of the fallen nature. Adam’s family thus failed to lay the foundation of substance. Consequently, God’s providence of restoration through Adam’s family could not be fulfilled.

실체기대의 결과

Ⅲ. 아담가정에 있어서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와 그의 상실

1.3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in Adam’s Family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한 터 위에서 ‘실체기대’를 세움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헌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믿음의 기대’는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복귀되고, ‘실체기대’는 ‘실체헌제(實體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상징헌제’ 및 ‘실체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is established by first restoring through indemnity the foundation of faith and then establishing the foundation of substance. With regard to their requisite sacrifices, the foundation of faith is restored by making an acceptable symbolic offering, and the foundation of substance is established by making an acceptable substantial offering. Let us examine the meaning and purpose of the symbolic offering and the substantial offering.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인 3대 축복(三大祝福)은 아담과 해와가 각각 개성을 완성하여 부부를 이루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자녀를 번식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들이 만물을 주관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그 3대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와 반대의 경로를 따라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워 주는 ‘상징헌제’를 드림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한다. 다음으로는 자녀를 복귀하고 그 위에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워 주는 ‘실체헌제’를 드림으로써 ‘실체기대’를 세워 가지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징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을 두 가지로 갈라서 생각할 수 있다.

The three great blessings, which are God’s purpose of creation, were to be realized when Adam and Eve, having perfected their individual character, became husband and wife. They were to give birth to good children, raise a good family, and master the natural world. However, due to the Fall, the three great blessings were lost. The way to restore them requires us to take the opposite course. First, we must establish the foundation of faith by making the symbolic offering, which fulfills a condition of indemnity for the restoration of all things and a condition of indemnity for the symbolic restoration of people. Next, we must establish the foundation of substance by making the substantial offering, which fulfills an indemnity condition for the restoration of first the children and then the parents. On this basis, we can establish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We can consider the meaning and purpose of the symbolic offering in two ways.

이미 타락론(墮落論)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사탄이 타락인간(墮落人間)을 주관하게 됨으로 인하여 그는 인간이 주관해야 할 만물세계(萬物世界)까지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서에 만물이 탄식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롬 8 : 22). 그러므로 만물로써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드리는 첫째 목적은 하나님의 상징적 실체대상인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First, as discussed above (cf. Fall 4.1), Satan gained dominion over the natural world through his domination of human beings, its rightful rulers. For this reason it is written, “the whole creation has been groaning in travail” (Rom. 8:22). Thus, one purpose for making the symbolic offering of all things is to enable all things to stand as God’s actual object partners in symbol. It fulfills an indemnity condition for the restoration of the natural world to its original relationship with God.

그리고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서 만물보다도 거짓된 자리에 떨어졌으므로(렘 17 : 9),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는 창조원리적(創造原理的)인 질서에 준하여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있는 존재인 만물을 통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따라서 ‘상징헌제’를 드리는 둘째의 목적은 실체 인간을 하나님 앞에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Second, since human beings fell to a position lower than the things of creation, (Jer. 17:9) in order for them to come before God, they must go through all things. This follows from the Principle of Creation, which requires that one approach God through that which is closer to Him. The second purpose for making the symbolic offering is thus to fulfill an indemnity condition for the symbolic restoration of human beings.

다음으로 ‘실체헌제(實體獻祭)’는 어디까지나 내적인 헌제이므로 만물과 인간의 창조의 순서가 그러했듯이 외적인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린 기대(基臺) 위에서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후에, 이 기대 위에서 다시 인간을 실체적으로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서 ‘실체헌제’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The substantial offering, on the other hand, is an internal offering. Following the order of creation, in which God created all things first and human beings afterwards, this internal offering to restore human beings can only be made on the basis of an acceptable symbolic offering. After the symbolic offering fulfills an indemnity condition both for the restoration of all things and for the symbolic restoration of human beings, we must make the substantial offering, which fulfills an indemnity condition for the complete restoration of human beings.

‘실체헌제(實體獻祭)’는 실체 인간을 복귀하기 위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 건’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인적인 존재가 아벨적인 존재를 실체로 헌제하여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아래에 해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도 세워지게 되기 때문에 ‘실체헌제’는 뜻맞는 헌제가 되는 것이다.

The substantial offering means fulfilling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This is essential for the actual restoration of human beings. The substantial offering is carried out when a person in Cain’s position honors the person in Abel’s position and sets him above himself as an offering. Through this, they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be restored as good children. At the same time, it is also reckoned as the indemnity condition for the restoration of their parents. In this manner, the substantial offering can meet God’s expectation. How can we understand the indemnity condition for the restoration of the parents?

메시아를 위한 기대

아담가정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기 위하여는 아담 자신이 먼저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아담부터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은 아담이 헌제를 하면 그 제물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이 대하게 되어 비원리적인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이었다.

To establish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in Adam’s family, Adam should have been the one to establish the foundation of faith by making the symbolic offering. However, as explained above, Adam could not make the offering, because if he had tried, his two masters, God and Satan, would have contended over it – an unprincipled situation. In addition, there is another reason from the aspect of feeling and heart.

그밖에도 여기에는 심정적인 면에서의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타락한 아담은 사실상 하나님에게 천추만대(千秋萬代)에 이르는 슬픔을 안기어 드린 죄악의 장본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직접 대하시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하실 수 있는 심정적인 대상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 대신으로 그의 차자(次子) 아벨을 세워서 ‘상징헌제’를 드리게 하셨다. 이렇게 하여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기대 위에서, 가인과 아벨이 ‘실체헌제’로써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더라면, 부모 된 아담은 그 ‘실체기대(實體基臺)’ 위에 서게 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그때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Fallen Adam was the very sinner who caused God the heartache and grief which was to last many thousands of years. He was not worthy to be the beloved of God’s Heart, with whom God could work directly to further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Accordingly, God chose Adam’s second son Abel in his stead and had Abel make the symbolic offering. Abel fulfilled the indemnity conditions for the restoration of all things and the symbolic restoration of human beings. If Cain and Abel had then fulfilled the indemnity condition for the restoration of the children by making an acceptable substantial offering, their father Adam would have shared in the victory of this foundation of substance. Thus, Adam’s family would have established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그런데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으로써 ‘실체헌제’를 하기 위하여서는 그 헌제의 중심인물(中心人物)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의 ‘상징헌제’에는 아담 대신으로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것과 또 아벨을 ‘실체헌제’의 중심인물로 결정하기 위한 것의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Before the substantial offering can be made, the central figure of the offering, the one who is to be offered, must be chosen. God had Abel make the symbolic offering for two reasons: first, to have him establish the foundation of faith in Adam’s place; second, to qualify him to be the central figure of the substantial offering.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가인이 세워야 했었는데 이것이 어찌하여 아담가정 전체가 세우는 결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Cain was the one to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yet his accomplishment would have resulted in the entire family of Adam fulfilling the condition.

그것은 마치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고,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가인과 아벨이 다 함께 자녀로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운 입장에 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How was this possible? It may be compared to the situation of the first human ancestors, who could have helped God accomplish His entire Will had they obeyed His Word. It may also be compared to the situation of the Jewish people of Jesus’ day, who could have helped Jesus accomplish his will to bring complete salvation to humankind had they believed in him. If Cain had yielded to Abel and fulfilled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both children would have been regarded as having fulfilled the indemnity condition together.

한편 또 가인과 아벨은 선악(善惡)의 모체인 아담을 분립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사탄을 분립하였더라면 그 부모 된 아담은 사탄을 분립한 그 입장에서 먼저 ‘실체기대(實體基臺)’ 위에 서게 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은 ‘상징헌제(象徵獻祭)’와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세워지는 것이다.

Cain and Abel were the offspring of Adam, the embodiment of both good and evil. Had they unshackled themselves from Satan’s chains by fulfilling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then Adam, their father, also could have separated from Satan and stood upon the foundation of substance. Thus,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would have been established by the family as a whole. In short, had Cain and Abel succeeded in making the symbolic and substantial offerings, the indemnity condition for the restoration of the parents would have been fulfilled.

그런데 아벨이 뜻맞는 헌제를 함으로써 아담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조건과 ‘실체헌제’를 드리기 위한 중심인물로서의 아벨의 입장은 세워졌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 아서 그들은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타락시킨 것과 같은 입장에 다시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게 됨으로써 ‘실체헌제’에 실패하여 ‘실체기대’를 세우지 못하게 됨에 따라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When Abel made his sacrifice in a manner acceptable to God, he fulfilled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store Adam’s foundation of faith and firmly secured his position as the central figure of the substantial offering. However, when Cain murdered Abel, they re-enacted the Fall, in which the Archangel murdered Eve spiritually. Needless to say, they did not fulfill the indemnity condition to remove the fallen nature and failed to make the substantial offering. Hence, neither the foundation of substance nor the foundation for the Messiah could be established. God’s providence of restoration in Adam’s family came to naught.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Ⅳ. 아담가정이 보여 준 교훈

1.4 Some Lessons from Adam’s Family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첫째 뜻 성사(成事)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떠하셨던가 하는 것을 보여 주셨다. 원래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반드시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합하여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 헌제(獻祭)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분담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헌제해야 된다는 것을 교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The failure of God’s providence of restoration in Adam’s family teaches us something about God’s conditional predestination of the accomplishment of His Will and His absolute respect for the human portion of responsibility. From the time of creation, God predestined that His Will be accomplished based on the combined fulfillment of God’s portion of responsibility and the human portion of responsibility. God could not instruct Cain and Abel on how to properly make their sacrifices because it was their portion of responsibility that Cain make his sacrifice with Abel’s help.

둘째,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나 그 후 하나님이 아벨 대신 셋을 세워 새로운 섭리를 하신 것으로써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인 것이고 인간에 대한 그의 예정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아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그가 ‘실체헌제(實體獻祭)’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예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벨이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한 입장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대신 셋을 세우시어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뜻을 이루어 나아가셨던 것이다.

Second, even after Cain killed Abel, God began a new chapter of His providence by raising Seth in Abel’s place. This shows us that God has absolutely predestined that His Will shall one day be fulfilled, even though His predestination concerning individual human beings is conditional. God foreordained that Abel succeed as the central figure of the substantial offering contingent upon fulfilling his own portion of responsibility. Therefore, when Abel could not complete his responsibility, God chose Seth in his place and carried on His efforts to accomplish the Will, which is predestined to be fulfilled without fail.

셋째, 가인과 아벨의 헌제로써 타락인간은 항상 아벨적인 존재를 찾아 그에게 순종굴복해야만 하늘이 요구하는 뜻을 자기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Third, through the offerings of Cain and Abel, God teaches us that fallen people must constantly seek for an Abel-type person. By honoring, obeying and following him, we can accomplish God’s Will even without understanding every aspect of it.

한편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것과 동일한 섭리(攝理)는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 후 계속 반복되어 내려왔다. 따라서 이 노정은 오늘날의 우리 자신들도 걸어야 할 탕감노정(蕩減路程)으로 그대로 남아져 있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오늘 우리들에게까지도 전형적(典型的)인 산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The providence which God worked to accomplish through Adam’s family has been repeated over and over again due to the faithlessness of human beings. Consequently, this course remains as the indemnity course which we ourselves must walk.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in Adam’s family thus provides us with many valuable lessons for our own path of faith.

아담가정이 보여 준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