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십자기에 의한 구원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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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s


Section 1. Salvation through the Cross

Ⅰ.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예수님의 목적

1.1 The Purpose of Jesus’ Coming as the Messiah

예수님이 메시아로 강림(降臨)하셨던 목적은 타락인간(墮落人間)을 완전히 구원(救援)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므로, 결국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천국을 이루셔야 했던 것이며, 따라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을 먼저 이루셔야 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 : 48)고 하신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Jesus came as the Messiah for nothing less than the complete salvation of humanity; he was to fulfill the goal of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Jesus was supposed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first on the earth. We can infer this from Jesus’ own teaching to his disciples, “You, therefore, must be perfec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Matt. 5:48).

The Purpose of Jesus’ Coming as the Messiah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신성(神性)을 갖게 되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인간은 창조목적을 두고 보면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같이 완전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바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어서 천국인(天國人)이 되라는 말씀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타락인간을 천국인으로 복귀케 하여 지상천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6 : 10), 또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치셨던 것이다(마 4 : 17). 그래서 그의 앞길을 예비하러 왔던 세례 요한도 역시 천국이 가까웠다고 부르짖었던 것이다(마 3 : 2).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Creation, a person who has realized the purpose of creation does not commit sin, because he is in full harmony with God and possesses a divine nature. With respect to the purpose of creation, such a person is perfect as Heavenly Father is perfect. Jesus gave this teaching to his disciples with the hope that they could be restored as people who had realized the purpose of creation and become citizens of the Kingdom. Furthermore, Jesus taught people to pray that God’s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because he came to renew fallen humanity as citizens of God’s Kingdom and build the Kingdom on earth. He also urged the people,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Matt. 4:17). For the same reason, John the Baptist, who came to prepare the way of the Lord, also announced the imminence of the Kingdom (Matt. 3:2).

그러면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과 같이 완전하게 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인가?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그의 심정(心情)을 체휼함으로써 신성(神性)을 갖게 되어 하나님과 불가분(不可分)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은 원죄(原罪)가 없으므로 다시 속죄(贖罪)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구주(救主)가 필요 없게 되며, 타락인간에게 요구되는 기도나 신앙의 생활도 역시 필요 없게 된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인간들에게는 원죄가 없으므로 그들은 원죄 없는 선(善)의 자손을 번식하게 되며, 따라서 그 자손들에게도 속죄를 위한 구주가 필요 없게 된다.

What will people be like once they have been restored as those who have realized the purpose of creation and become perfect as Heavenly Father is perfect? Such people are fully attuned to God and experience God’s Heart within their innermost self. They possess a divine nature and live their life with God, inseparable from Him. Moreover, they do not have the original sin, and hence are not in need of redemption or a savior. They do not need to pray arduously or practice a faith, both of which are necessary for fallen people as they seek God. Furthermore, since they do not have the original sin, their children are naturally born good and sinless and likewise have no need of a savior for the redemption of their sins.

Ⅱ.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하여 구원섭리가 완성되었는가

1.2 Was Salvation Completed through the Cross?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인하여 과연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이 완성되어 모든 성도들이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함으로써 지상천국을 이루게 되었는가? 인류역사 이래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신성을 갖게 되어 하나님과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생활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속죄가 필요 없고 기도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성도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실상 바울같이 훌륭한 신앙자에게 있어서도 눈물겨운 기도와 신앙생활은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롬 7 : 18∼25). 뿐만 아니라 아무리 잘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구주의 대속함이 없이 천국 갈 수 있는 원죄 없는 자식을 낳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 부모가 여전히 자식에게 원죄를 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Did Jesus’ crucifixion, which brought us redemption from our sins, fulfill the purpose of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If so, we would expect that faithful believers in Jesus would have restored their original nature and built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Yet in the entire history of Christianity, there has been no one, no matter how devout, who lived his life in inseparable oneness with God. Not one person has ever experienced God’s Heart in its full intensity or possessed a divine nature. There has never been a believer who had no need of redemption or a life of ardent prayer and devotion. Even St. Paul, a great man of God, could not dispense with a life of faith and tearful prayer (Rom. 7:18-25). Moreover, no Christian parent, no matter how devout, has ever given birth to a child without the original sin, who could enter God’s Kingdom without the grace of redemption by the Savior. Christian parents continue to transmit the original sin to their children.

Was Salvation Completed through the Cross?

그러면 기독교 신도들의 이러한 신앙생활의 실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의한 속죄(贖罪)가 우리의 원죄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인간의 창조본성을 완전히 복귀해 주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듯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써는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그의 목적을 완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재림(再臨)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천국을 복귀하시려는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절대적이어서 변할 수 없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다시 오셔서 그 뜻을 완성하시려는 것이었다.

What can be learned from this stark review of the Christian life? It teaches us that the grace of redemption by the cross has neither fully uprooted our original sin nor perfectly restored our original nature. Jesus, knowing that the redemption by the cross would not completely fulfill the purpose for which he came, promised he would come again. He understood that God’s Will to restore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is absolute and unchangeable. Thus, Jesus hoped to return and accomplish the Will of God completely.

그러면 십자가(十字架)의 희생은 전혀 무위(無爲)로 돌아간 것인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요 3 : 16). 만일 그렇다면 오늘의 기독교(基督敎)의 역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체험으로 보아도 십자가 대속의 은사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대속의 역사(役事)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원죄까지 완전히 벗겨 줌으로써 죄를 지으려 하여도 지을 수 없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시켜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어 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Was Jesus’ sacrifice on the cross for naught? Of course not (John 3:16). If it were, Christianity would not have brought forth its illustrious history. Furthermore, our own personal experiences in faith make it plain how great is the grace of redemption by the cross. It is true that the cross has redeemed our sins; yet it is equally true that the cross has not entirely purged us of our original sin. It has not restored us to the unfallen state of perfected original nature in which we would never commit sin, and it has not enabled us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그렇다면 십자가로 인한 속죄의 한계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현대 지성인들의 신앙을 교도(敎導)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문제를 밝히 알아야겠다.

What is an accurate assessment of the extent of salvation through the cross? Unless this question is answered, it is difficult for people in the modern world to properly guide their faith. First, however, we must re-examine Jesus’ death on the cross.

Ⅲ.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1.3 Jesus’ Death on the Cross

우리는 먼저 성경상에 나타난 사도(使徒)들의 언행(言行)을 중심삼고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이 당연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Was Jesus’ death on the cross the most desired Will of God? Let us first examine the words and deeds of the disciples as recorded in the Bible.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느낀 뚜렷한 하나의 정념(情念)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김으로써 분개하고 서러워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을 통분히 여겼으며, 그들의 행위를 패역무도(悖逆無道)한 것으로 여겨 저주하였다(행 7 : 51∼53). 그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기독교 신도들도 공통적으로 당시의 사도들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내려왔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결과였다면 사도들이 그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정이겠지만, 하나님의 예정대로 이루어진 그 섭리(攝理)의 결과에 대해서 그렇게도 분개하고 저주했을 리는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예수님은 온당치 않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There was one unanimous feeling evident among the disciples concerning the death of Jesus: they were grief-stricken and indignant. Stephen, for example, burned with indignation over the ignorance and disbelief of the Jewish leaders, and he condemned their actions, calling them murderers and rebels (Acts 7:51-53). Christians since then have commonly shared the same feelings as the disciples of Jesus’ day. If Jesus’ death had been the foreordained outcome for the fulfillment of God’s Will, then it might have been natural for the disciples to grieve over his death, but they would not have been so bitterly resentful over it, nor so angry at those Jewish leaders who caused it. We can infer from their bitter reaction that Jesus’ death was unjust and undue.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과연 하나님의 예정(豫定)에서 되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Next, let us examine from the viewpoint of God’s providence whether the crucifixion of Jesus was inevitable as the predestined Will of God.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부르시어 저들을 보호 육성하시고, 때로는 그들을 고난과 시련으로써 인도하셨다.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시어 위로하시며 장차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굳게 약속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막(聖幕)과 성전(聖殿)을 지음으로써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게 하시고, 동방박사(東方博士), 시므온, 안나, 세례 요한 등을 보내시어 메시아의 탄생과 그의 현현을 널리 증거하셨던 것이다.

God called the chosen people of Israel out of the descendants of Abraham. He protected them, nurtured them, and at times disciplined them with tribulations and trials. God sent prophets to comfort them with the unshakable promise that one day He would send them a Messiah. He prepared them to receive the Messiah by having them build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When Jesus was born, God proclaimed his advent. He sent the three wise men from the East as well as Simon, Anna, John the Baptist and others to testify widely.

특히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그가 잉태(孕胎)될 때 천사(天使)가 나타나서 증거한 사실을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고(눅 1 : 13), 그가 출생할 때에 되어진 기사(奇事)는 당시의 유대 성중(城中)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눅 1 : 63∼66). 뿐만 아니라 광야에 있어서의 그의 수도생활(修道生活)은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가 메시아가 아닌가고 생각케 할 정도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눅 3 : 15). 하나님이 이렇듯 위대한 세례 요한까지 보내시어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게 하셨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Concerning John the Baptist in particular, many people knew that an angel had appeared and testified to his conception (Luke 1:13). The miracles surrounding his birth stirred all of Judea in expectation (Luke 1:63-66). Furthermore, John’s ascetic life in the wilderness was so impressive that many people questioned in their hearts whether perhaps he was the Christ (Luke 3:15). God’s purpose behind sending such a great personality as John the Baptist to bear witness to Jesus as the Messiah was to encourage the Jewish people to believe in Jesus.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어디까지나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이스라엘은 그를 메시아로 믿어야만 했었다. 만일 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더라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고대해 왔던 그 메시아를 누가 십자가(十字架)에 내주었을 것인가?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길에 내준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반(反)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길을 가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Since God’s Will was thus to have the Jewish people of that time believe that Jesus was their Messiah, the Jewish people, who were trained to live by God’s Will, should have believed in him. Had they believed in him as God desired, would they have even entertained the thought of sending him to the cross? Would they have wanted any harm to come to the Messiah whom they had so long and eagerly awaited? However, because they went against God’s Will and did not believe that Jesus was the Messiah, he was delivered to be crucified. We must understand, therefore, that Jesus did not come to die on the cross.

다음으로 우리는 예수님 자신의 언행(言行)으로 보아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과연 메시아로 오셨던 그 전목적을 이루기 위한 길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Next, let us examine the words and deeds of Jesus himself to ascertain whether his crucifixion was in fact the way to completely accomplish his mission as the Messiah.

하나님의 모든 섭리가 그러했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도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도록 언행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 : 29)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또 유대인들의 배신행위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시고 호소할 곳이 없어 성을 바라다보고 우시면서, 하나님이 2천년 동안이나 애쓰시며 사랑으로 이끌어 온 이스라엘 선민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이 성마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지지 않을 정도로 멸망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저주하시면서,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 : 41∼44)고 명백히 그 무지를 지적하셨던 것이다.

Jesus’ words and deeds were meant to engender belief on the part of the people that he was the Messiah. For example, when the people asked him what they must do to be doing the works of God, Jesus replied: This is the work of God, that you believe in him whom he has sent (John 6:29). One day, when he was agonizing over the Pharisees’ disbelief and having no one with whom to share his heart, Jesus looked down sadly over the city of Jerusalem. He wept as he lamented the fate of the Jewish people, whom God had so laboriously and lovingly guided for two thousand years. Jesus prophesied that the city would be so utterly laid waste that not one stone would be left upon another. He clearly pointed to the ignorance of the people, saying, “you did not know the time of your visitation” (Luke 19:44).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 : 37)라고 하시어 그들의 완고와 불신을 한탄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증거하고 있는 성경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를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 : 39∼40)라고 슬퍼하셨다. 그는 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라고 서러워하시면서, 이어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 : 43∼46)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On another occasion, Jesus lamented the stubbornness and disbelief of the people of Jerusalem, saying: O Jerusalem, Jerusalem, killing the prophets and stoning those who are sent to you! How often would I have gathered your children together as a hen gathers her brood under her wings, and you would not! (Matt. 23:37). Jesus reproached the people who refused to believe in him, even though they were familiar with the Scriptures which testified to him: You search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in them you have eternal life; and it is they that bear witness to me; yet you refuse to come to me that you may have life (John 5:39-40). I have come in my Father’s name, and you do not receive me . . . if you believed Moses, you would believe me, for he wrote of me (John 5:43-46).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돌이키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보여 주셨던가. 그러나 그들은 그 놀라운 일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바알세불이 접한 자라고 비난하지 않았던가(마 12 : 24). 그리고 이러한 비참한 정경(情景)을 보시는 예수님은 때로는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 : 38)고도 말씀하셨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그들에게 화가 있으라고 분노를 퍼붓기도 하셨던 것이다(마 23 : 13∼36).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이와 같이 저들에게 자기를 믿을 수 있도록 언행을 하셨던 것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신 대로 그를 메시아로 믿었더라면 누가 그를 십자가의 죽음길로 몰아냈을 것인가!

How many miracles and signs did Jesus perform in his desperate efforts to lift the people from their disbelief! Yet, even as they were witnessing the wondrous works of Jesus, the religious leaders mocked him as one possessed by Beelzebul (Matt. 12:24). In the midst of such a wretched situation, Jesus cried out: Even though you do not believe me, believe the works, that you may know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am in the Father (John 10:38). Then, confronting his opponents, he scathingly denounced their hypocrisy (Matt. 23:13-36). Through his words and deeds, Jesus tried to bring his people to believe in him, because it was God’s Will that they do so. If they had followed God’s Will and believed in Jesus as their Messiah, then who among them would have dared to send him to the cross?

우리는 위에서 논증한 모든 사실로 보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가 메시아로 오셨던 전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의 결과로 온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2장 8절의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는 성구는 바로 이 사실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From all the above evidence, we can deduce that Jesus’ death on the cross was the unfortunate outcome of the ignorance and disbelief of the people of his day; it was not necessary for the complete fulfillment of his mission as the Messiah. This is well illustrated by Jesus’ last words on the cross: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Luke 23:34).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 노정이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예정하신 길이었다면, 그는 당연히 가셔야 할 길을 걸어가시면서 무엇 때문에 할 만하면 그 죽음의 잔을 면케 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를 올리셨을 것인가(마 26 : 39)? 실상 그것은 인간이 타락(墮落)된 이후 4천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애쓰셨던 지상천국이 유대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실 때까지 고난의 역사가 그대로 연장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If God had originally predestined Jesus to die on the cross, Jesus would have expected to go that path as his due course. Why, then, did he pray three times, “My Father, if it be possible, let this cup pass from me; nevertheless, not as I will, but as thou wilt”? (Matt. 26:39). In truth, Jesus offered those desperate prayers because he knew well that his death would shatter the hope of attaining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This would be a tragic disappointment to God, who had worked so laboriously to realize this hope through the long ages since the Fall. Furthermore, Jesus knew that humanity’s afflictions would continue unrelieved until the time of his Second Coming.

요한복음 3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埃及)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광야(曠野)에서 모세를 믿지 않게 되자 불뱀이 나와서 그들을 물어 죽이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리뱀을 장대 끝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살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써 만민이 지옥으로 가야만 하게 되었기 때문에, 장차 예수님이 구리뱀과 같이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신 후 그것을 쳐다보고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예견(豫見)하시면서 예수님은 서글픈 심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Jesus said, “As Moses lifted up the serpent in the wilderness, so must the Son of man be lifted up” (John 3:14). When the Israelites lost faith in Moses on the way to Canaan, fiery serpents appeared and began to kill them. God commanded Moses to make a bronze serpent and set it on a pole, so that all who looked upon the serpent might live (Num. 21:4-9). Similarly, Jesus foresaw that due to the chosen people’s failure to believe in him, humankind would be consigned to hell. He foresaw that he would then be nailed to the cross like the bronze serpent in order to save all humankind, granting salvation to all who look to him. Foreseeing this eventuality, Jesus uttered this foreboding prophecy with a mournful heart.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눅 19 : 44) 그가 돌아가신 후 이스라엘 선민이 쇠망(衰亡)한 것을 보아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사야 9장 6절 이하에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 왕의 위(位)를 가지고 오셔서 영원히 멸하지 않을 왕국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잉태될 때에도,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 : 31∼33)는 말씀을 전하였던 것이다.

Another indication that Jesus’ death on the cross was not the Will of God, but rather due to the disbelief of the people, is that Israel declined after the crucifixion (Luke 19:44). After all, it had been prophesied that Jesus would come and sit on the throne of David and establish an everlasting kingdom: For to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will be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Of the increase of his government and of peace there will be no end, upon the throne of David, and over his kingdom, to establish it, and to uphold it with justice and with righteousness from this time forth and for evermore. The zeal of the Lord of hosts will do this (Isa. 9:6-7). An angel appeared to Mary prior to Jesus’ conception and made a similar prediction: Behold, you will conceive in your womb and bear a son, and you shall call his name Jesus. He will be great, and will be called the Son of the Most High; and the Lord God will give to him the throne of his father David, and he will reign over the house of Jacob forever; and of his kingdom there will be no end (Luke 1:31-33).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선민을 불러 2천년간이나 고난 가운데서 이끌어 나오신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시어 영원히 존속할 왕국을 이룩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다가 유대인들에게 몰려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저들은 선민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지리멸렬(支離滅裂)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민족적인 학대를 받아 나왔다. 이것은 그들이 신봉(信奉)해야 할 메시아를 도리어 살해함으로써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이루시지 못하게 하였던 그 범죄에 대한 벌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이후 수많은 성도들이 당하여 온 십자가의 고난도 예수님을 살해한 연대적 범죄(連帶的 犯罪)에 대한 형벌이었던 것이다.

God’s clear intention for the chosen people of Israel, whom He had led through all manner of difficulty from the time of Abraham, was to send them a Messiah and build an eternal Kingdom on earth. Nevertheless, when the Jewish leadership persecuted Jesus and led him to the cross, Israel lost its qualification to be the founding nation of God’s Kingdom. Within a few generations, the people of Israel would be scattered over the face of the earth. They have suffered oppression and persecution ever since. This can be viewed as the tragic consequence of the mistake their ancestors committed when they condemned to death the Messiah, whom they should have honored, thereby preventing the completion of the providence of restoration. Moreover, not only the Jews, but also many faithful Christians have shouldered the cross as their portion for the collective sin of having killed Jesus.

Jesus’ Death on the Cross

Ⅳ.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한 구원의 한계와 예수 재림의 목적

1.4 The Limit of Salvation through Redemption by the Cross and the Purpose of Jesus’ Second Advent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예수님은 영육(靈肉) 양면의 구원섭리를 완수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의 예언(사 9 : 6∼7)과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교시(눅 1 : 31∼33) 그대로, 또 예수께서 친히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신 말씀(마 4 : 17)과 같이 그는 영원토록 소멸되지 않는 지상천국을 건설하셨을 것이었다.

What would have happened if Jesus had not been crucified? Jesus would have accomplished both the spiritual and physical aspects of salvation. He surely would have established the everlasting and indestructible Kingdom of Heaven on earth. This, after all, had been foretold by the prophet Isaiah, announced by the angel who appeared to Mary, and expressed by Jesus himself when he announced that the Kingdom of Heaven was at hand (Isa. 9:6-7); (Luke 1:31-33); (Matt. 4:17).

The Limit of Salvation through Redemption by the Cross and the Purpose of Jesus’ Second Advent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육신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다(창 2 : 7). 이와 같이 영(靈)과 육(肉)으로 창조된 인간이므로, 타락도 역시 영육 아울러 된 것이었다. 따라서 구원도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아울러 하셔야만 되는 것이다.

When God created man, “the Lord God formed man of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being” (Gen. 2:7). Human beings were thus created in both spirit and flesh. Their Fall also happened both spiritually and physically.

예수님이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목적이 구원섭리를 완수하시려는 데 있었으므로, 그는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아울러 완성하셔야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일체를 이룬다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스스로를 포도나무로 신도들을 그 가지로 비유하셨고(요 15 : 5), 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 : 20)고도 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영육(靈肉) 아울러 타락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가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를 믿음으로써 영육 아울러 그와 하나가 되었더라면 타락인간도 영육 아울러 구원을 받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여 그를 십자가(十字架)에 내주었으므로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마침내 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사탄의 침범을 당한 예수님을 믿어 그와 한 몸을 이룬 신도들의 육신도 그대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된 것이다.

Since Jesus came to bring full salvation, he was responsible to complete it both spiritually and physically. To believe in Jesus means to become one with him. Hence, Jesus likened himself to a true vine and compared his disciples to its branches (John 15:5). He also said, “In that day you will know that I am in my Father, and you in me, and I in you” (John 14:20). In order to save fallen people physically as well as spiritually, it was necessary that Jesus come in the flesh. Had the people believed in Jesus and so united with him in both spirit and flesh, they would have received salvation both spiritually and physically. Yet the people did not believe in Jesus; instead they led him to the cross. Jesus’ body was exposed to Satan’s assault, and he was killed. Therefore, even when faithful Christians are united with Jesus, their bodies remain exposed to Satan’s attack, just as was Jesus’ body.

The Limit of Salvation through Redemption by the Cross and the Purpose of Jesus’ Second Advent

이렇게 되어 아무리 독실한 신앙자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贖罪)로써는 육적 구원은 완성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혈통적인 원죄(原罪)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에게 원죄는 그대로 남아지게 되어 그는 또 원죄 있는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육신을 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원죄로 말미암아 항상 육신을 통하여 들어오는 사탄 침범의 조건을 막기 위함이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 : 17)한 것도 이와 같이 십자가에 의한 구속(救贖)으로도 근절되지 않은 원죄로 인한 사탄 침범의 조건을 막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Consequently, no matter how devout a believer may be, he cannot attain physical salvation through redemption by the cross of Jesus. His original sin, which has been passed down through the lineage from Adam, is not eliminated at its root. Even the most devout Christian still has the original sin and gives birth to children who also carry the original sin. In our personal faith, we may feel it necessary to mortify and deny our flesh in our efforts to prevent the intrusion of Satan, who continually tries to ensnare us through our bodies. We are taught to “pray constantly” (I Thess. 5:17) that we might remove the conditions by which Satan can attack us; these conditions stem from the original sin, which was not eradicated despite salvation through redemption by the cross.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의 육신이 사탄의 침범을 당함으로써 육적 구원섭리의 목적은 달성하시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피의 대속(代贖)으로 부활의 승리적인 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영적 구원의 기대를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부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신도들은 영적 구원섭리의 혜택만을 받게 되는 것이다.

Jesus could not fulfill the goal of complete salvation, both spiritual and physical, because his body was struck down by Satan. However, Jesus laid the basis for spiritual salvation by securing the victorious foundation for his resurrection through the redemption by his blood on the cross. As a result, all believers since his resurrection have received the benefit of spiritual salvation, but not physical salvation.

이와 같이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인한 구원은 영적 구원뿐이므로 잘 믿는 신도들에게도 원죄(原罪)는 육적으로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것이 계속적으로 그 자손들에게 유전되어 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도들은 그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죄와 더불어 더욱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십가가로써 청산하시지 못한 원죄를 속하고 육적 구원을 완성함으로써 영육(靈肉) 아우른 구원섭리의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지상에 재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Salvation through redemption by the cross is spiritual salvation only. The original sin remains active in the flesh of even the most devout Christians and is transmitted through the lineage to their descendants. The more fervent a believer’s faith, the more fiercely he must fight against the sin within.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의 대속을 받은 성도들도 원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 사도(使徒)들 중에서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바울도 육적으로 들어오는 죄악의 길을 막을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던 끝에,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 : 25)고 말하였다. 이것은 영적 구원의 완성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육적 구원의 미완성에 대한 비탄을 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또 요한일서 1장 8절 내지 10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라고 한 요한의 고백대로, 예수님의 십가가의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들도 여전히 원죄 때문에 범죄자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Even St. Paul, the most devout among the apostles, lamented over his inability to prevent sin from infiltrating his flesh: For I delight in the law of God, in my inmost self, but I see in my members another law at war with the law of my mind and making me captive to the law of sin which dwells in my members. Wretched man that I am! Who will deliver me from this body of death? Thanks be to God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So then I of myself serve the law of God with my mind, but with my flesh I serve the law of sin (Rom. 7:22-25). This statement contrasts the bliss Paul felt upon receiving spiritual salvation with the agony he felt because he was unable to achieve physical salvation. John also confessed: If we say we have no sin, we deceive ourselves, and the truth is not in us. . . . If we say we have not sinned, we make him a liar, and his word is not in us (I John 1:8-10).

We who receive salvation based on Jesus’ crucifixion cannot unshackle ourselves from the chains of sin, due to the original sin still active deep within us. Therefore, to uproot the original sin, which he could not remove through the crucifixion, and to complete the work of physical salvation, Jesus must come again on earth. Only then will the purpose of God’s work of salvation be fulfilled both spiritually and physically.

Ⅴ. 십자가에 대한 예언의 양면

1.5 Two Kinds of Prophecies Concerning the Cross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이 그가 메시아로 오셨던 전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사야 53장에 그가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것으로 예언되어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If Jesus’ death on the cross were not predestined as necessary for the complete accomplishment of his purpose as the Messiah, why was it prophesied in Isaiah that he would suffer the ordeal of the cross? (Isa. 53).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만이 성경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리(原理)를 알고 성서를 다시 읽어 보면,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이미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에 의하여 예언된 이사야 9장, 11장, 60장 등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천사(天使)를 보내시어 장차 잉태될 예수님이 생전에 유대인의 왕이 되어 영영세세(永永世世)토록 소멸되지 않는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실 것을 예언케 하셨던 사실을 알게 된다(눅 1 : 31∼33). 그러면 어찌하여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게 되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We may think that the Bible contains only prophecies which foretold Jesus’ suffering. However, when we read the Bible anew with knowledge of the Principle, we realize there are other prophecies to the contrary. As Isaiah prophesied (Isa. 9, Isa.11, Isa.60) and as the angel announced to Mary, (Luke 1:31-33) it was foretold that Jesus would become the king of the Jews in his lifetime and establish an everlasting kingdom on the earth. Let us investigate why God gave two contrasting kinds of prophecies concerning Jesus.

Two Kinds of Prophecies Concerning the Cross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만 완성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전편 제1장 제5절 Ⅱ 2).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인간 시조(始祖)는 그들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도 있었던 것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여 그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God created human beings to reach perfection only by fulfilling their own portion of responsibility (cf. Creation 5.2.2). In reality, the first human ancestors did not fulfill their responsibility and fell. Thus, human beings have the potential to either accomplish their responsibility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or fail their responsibility contrary to God’s Will.

이러한 예를 성서에서 들어 보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분담이었기 때문에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것을 안 따먹고 완성될 수도 있는 반면에 결과적으로 나타난 사실과 같이 따먹고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To take some examples from the Bible, it was Adam’s portion of responsibility not to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He either could obey the commandment of God and reach perfection or eat of the fruit and die. He chose the latter.

한편 또 하나님은 구약시대의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위한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의 조건으로 십계명(十誡命)을 주셨던 것인데, 여기에서도 인간은 그것을 지키어 구원을 받을 수도 있었고, 혹은 그것을 지키지 않고 멸망을 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In the Old Testament Age, God gave the Ten Commandments and the Mosaic Law, which the people were to obey as the condition for their salvation. It was their portion of responsibility to either uphold the Law and receive salvation or disobey it and come to ruin (Deut. 30:15-20).

애급(埃及)에서 가나안 복지(福地)를 향하여 떠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세워야 할 책임분담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복지로 들어갈 수도 있었고, 혹은 불순종(不順從)하여 못 들어가게 될 수도 있었다. 사실상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게 하실 것을 예정하시고(출 3 : 8) 그에게 이를 명령하셨었으나, 불신으로 인하여 그들은 모두 광야(曠野)에서 쓰러지고 그 후손들만이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For the Israelites who left Egypt and journeyed toward Canaan, it was their responsibility to obey the instructions of Moses. They could either faithfully comply with Moses’ directions and enter the land of Canaan or rebel against him and not enter the promised land. In fact, God had foretold that He would guide the Israelites into the land of Canaan (Exod. 3:8) and commanded Moses to lead them there. Yet due to their lack of faith, the people perished in the wilderness, leaving only their descendants to reach the final destination.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이 수행해야 될 책임분담(責任分擔)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것을 이루어 드릴 수도 있고, 혹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 드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자신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에 따라 그 어느 한 면의 결과를 이루어 놓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뜻 성사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Human beings thus have their own portion of responsibility; they can either fulfill it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or fail to fulfill it contrary to His Will. The nature of the fruits they bear depends upon whether or not they fulfill their portion of responsibility. For this reason, God gave two kinds of prophecies concerning the accomplishment of His Will.

메시아를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이지만, 오시는 메시아를 믿고 안 믿는 것은 인간의 책임분담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내시는 메시아를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뜻대로 믿을 수도 있었던 것이고, 혹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믿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에 따라 나타날 양면의 결과에 대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의 뜻 성사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시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53장의 기록과 같이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는 경우에 대한 예언도 하셨지만, 한편 이사야 9장, 11장, 60장과 누가복음 1장 31절 이하의 기록과 같이 저들이 메시아를 믿고 모심으로써 영광으로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경우에 대한 예언도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사야 53장의 예언만이 이루어지고, 이사야 9장, 11장, 60장 및 누가복음 1장 31절 이하의 예언은 모두 재림하셔서 이루어질 말씀으로 남아진 것이다.

To send the Messiah is God’s portion of responsibility. However, belief in the Messiah is the human portion of responsibility. The Jewish people could either believe in the Messiah as God wished or not believe in him in opposition to His desire. To cope with the contingency of human responsibility, God gave two kinds of prophecies concerning the accomplishment of His Will through Jesus. One kind foretold that Jesus would die due to the disbelief of the people (Isa. 53). Another kind foretold that the people would believe in and honor Jesus as the Messiah and help him to accomplish God’s Will in glory (Isa. 9, Isa. 11, Isa. 60); (Luke 1:31). When Jesus died on the cross due to the disbelief of the people, only the prophecies of the first kind were fulfilled. The prophecies of the second kind were left unfulfilled until the Second Coming of Christ.

Ⅵ.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성구

1.6 Gospel Passages in Which Jesus Spoke of His Crucifixion as if It Were Necessary

복음서(福音書)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데가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 보면,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하실 때, 이것을 만류하는 베드로를 보시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 : 23)고 하신 책망으로 미루어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이 어찌하여 베드로를 대해 그토록 책망하셨을 것인가? 그러나 실에 있어 예수님은 그때 이미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어차피 영육(靈肉) 아우른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완성하실 수 없게 되자, 영적 구원만이라도 이루시려고 그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서 부득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로 결정하고 계시던 때였다(눅 9 : 31). 그런 때에 베드로가 이 길을 만류한 것은 결국 십자가로 인한 영적 구원섭리의 길마저 방해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처럼 책망하셨던 것이다.

There are several passages in the Gospels in which Jesus spoke of his suffering on the cross as if it were necessary for salvation. For example, when Peter heard Jesus’ prediction of his imminent crucifixion and tried to dissuade him, Jesus rebuked him, saying, “Get behind me, Satan! You are a hindrance to me” (Matt. 16:23). Why did Jesus chastise Peter so harshly? In truth, when Jesus spoke these words, the disbelief of the chosen people had already frustrated Jesus’ efforts to complete the providence of salvation both physically and spiritually. By that time, Jesus had resolutely determined to accept the fate of the cross (Luke 9:31) as a condition of indemnity to open the way for at least the spiritual salvation of humankind. Peter’s dissuasion could have hindered Jesus from paving the way for spiritual salvation through the cross. For this reason, Jesus rebuked him.

Gospel Passages in Which Jesus Spoke of His Crucifixion as if It Were Necessary

다음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상(十字架上)에서 다 이루었다(요 19 : 30)고 최후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로써 구원섭리의 전목적이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불신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아시게 된 후부터 예수님은 육적 구원은 재림(再臨) 후의 섭리로 미루시고, 영적 구원섭리의 기대만이라도 조성하시려고 십자가의 노정을 걸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말씀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제2차적인 구원섭리의 목적으로 세우셨던 십자가에 의한 영적 구원섭리의 기대를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었던 것이다.

A second example is Jesus’ last words on the cross, “It is finished” (John 19:30). Jesus did not utter these words to mean that through the crucifixion he had completely accomplished the providence of salvation. After he realized that the people’s disbelief was unalterable, he chose the path of the cross in order to lay the foundation for spiritual salvation, leaving unfulfilled the task of achieving physical salvation until the time of the Second Advent. Hence, by the words, “It is finished,” Jesus meant that he had finished laying the foundation for spiritual salvation. By this time, it had become the alternative goal of the providence.

Gospel Passages in Which Jesus Spoke of His Crucifixion as if It Were Necessary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하여는, 첫째로 기도에 의한 신령(神靈)으로 하나님과 직접 영교(靈交)해야 되고, 다음으로는 성서를 바르게 읽음으로써 진리(眞理)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요 4 : 24)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In order for us to have proper faith, it is necessary first to have direct communion with God through spiritual experiences in prayer, and then to understand the truth through a correct reading of Scripture. This is the reason Jesus told us to worship in “spirit and truth” (John 4:24).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聖徒)들은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던 근본목적을 알지 못하고 영적 구원이 예수님이 띠고 오셨던 사명의 전부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서 뜻을 이루시려고 오셨다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원치 않는 죽음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억울하고도 비통한 심정을 풀어 드리고 그의 뜻을 맞추어 드리는 신부가 지상에 생겨나기 전에, 예수님이 누구와 더불어 그 뜻을 이루시겠다고 재림(再臨)하실 것인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 : 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무지를 예상하시고 개탄하신 말씀이었다.

Since the time of Jesus, Christians have believed that Jesus came to this world to die on the cross. They have not known the fundamental purpose for which Jesus came as the Messiah and misunderstood the spiritual salvation which he brought us, thinking it to be all that his mission entailed. Jesus had wanted to live and fulfill his destiny, yet due to the people’s disbelief in him, he died with a heart full of disappointment. Today, there must appear on earth faithful brides – pure-hearted believers – who can alleviate the bitter and grieving heart of Jesus. There must appear brides who can exalt the desires of Jesus’ heart before Jesus can come again as the bridegroom. Yet Jesus lamented, “Nevertheless,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earth?” (Luke 18:8) for he foresaw that when he returned the people would likely be in darkness.

우리는 여기에서 성서를 중심하고,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죽음의 길을 가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영교로써 예수님에게 직접 물어 보면 더욱 명백하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자기가 영통(靈通)을 하지 못하면 영통하는 딴 사람의 증언을 통하여서라도 바른 신앙을 가져야만 끝날에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We have clarified from our study of the Bible that Jesus did not come to die on the cross. We can ascertain this fact even more clearly if we communicate with Jesus spiritually and ask him directly. If we cannot perceive spiritual realities, we should seek out the testimonies of those who are endowed with such gifts in order to properly understand his heart and deepen our faith. Only then will we be worthy to become the brides of Jesus who can receive him in the Last 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