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은 내가 있기 전에 있었다. 하나님이 뜻의 시작이요, 뜻의 내용이요, 뜻의 목적이다.
‘뜻 길’ 책에서 인용
뜻은 우리의 모든 행복의 요소요, 우리의 자랑이요, 우리의 권위요, 우리의 지식이 된다.
사람은 왔다가 그냥 갈 수 있지만 뜻은 왔다가 그냥 갈 수 없다. 반드시 열매맺고 결말을 지어 놓아야 된다.
선생님은 뜻을 놓고는 일보(⼀步)도 양보하지 않는다. 뜻 하나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 있어도 거기에는 외곬이다.
우리는 가야 할 길을 남겨 두고 오늘에 만족하는 자가 되지 말고, 이 세계의 미련(未練)을 끊을 수 있는 더 큰 뜻을 지니고 새 역사를 개척해 나가자.
솔직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행동할 때 선은 결정된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동과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심정을 책임져 주는 사람을 찾고 있다.
하나님이 역사적인 공매장에 여러분을 끌고 가셔서 공매에 부칠 때 여러분은 얼마만한 가치가 될 것인가?
원수지간이지만 심정적 인연을 남긴 그러한 사람이 될 때는 역사를 되찾아 만날 수 있고 다시 살 수 있다.
슬픔의 극점을 넘었을 때는 최고의 기쁨이 오는 것이다.
천국은 자녀와 같은 심정, 부부와 같은 심정,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인연(因緣)지어진 세계가 한 가정을 이룬 사회이다.
행복은 승리적인 심정의 권한을 가지고야 획득할 수 있다.
말씀으로 이상(理想)을 주고, 인격으로 실천(實踐)을 보여 주고, 심정으로 사랑을 주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 심정, 내적 기준, 주체적 가치(價値)가 어떻게 되었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이다.
남보다 풍부한 일생을 가지려면 남보다 풍부한 여운을 많이 가져야 한다.
주는 시기에 받겠다면 망한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더라도 주는 심정으로 생활해 나가자.
인격의 중심은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정에 있다.
진리(眞理)의 말씀은 문을 여는 것, 그 다음에는 심정(心情)으로 길러 주어야 한다.
심정은 소망이며 목적이고, 사정(事情)은 생활이다.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생활을 펼쳐 나가자.
하나님이 찾아오신 마음의 터를 인계받아 나가자. 하나님은 거짓으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골수 중의 골수의 심정을 갖고 찾아오신다. 나의 피살에도 이런 심정이 사무쳐 있어야 한다.
선한 사람은 자연을 보나, 사람을 만나나, 어디를 가나, 어느 때나 심정으로 덮어 줄 수 있는 자다.
하늘이 대할 수 있는 참신하고 자극적인 맛을 풍기는 심정적인 재료를 항상 제시하라.
심정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다. 심정의 골짜기의 길은 고통스럽고 처참한 길이다. 심정의 골짜기는 파고들면 들수록 눈물이요, 또 자기는 없어진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온 땅의 곳곳에 다 가고 싶어하신다. 가시는 데는 자녀가 정성의 터를 닦아 기다리는 곳으로 가시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늘 자녀로서 땅끝까지 개척하여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진모(眞貌)를 알기에 힘쓰라. 그다음에는 `‘아버지!’ 하고 부르기만 해도 통곡하는 선생님을 배워라.
사랑의 주인공, 심정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자. 아무리 위인(偉人)이 나온다고 하여도 인류의 심정을 정복 못하면 소용이 없다.
타락 이후 섭리해 오신 하나님과 인연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락 전의 하나님과 심정의 인연을 맺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선생님이 여러분을 대함은 일의 성패(成敗)의 문제로서가 아니고 그 심정적 동기가 어떠한가를 보고 대한다. 즉 자기 중심이냐, 하나님 중심이냐가 중요하다. 심정적 기준이 하나님이 세운 것과 같으면 문제는 다 해결된다.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그로부터 창조되었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과 부자지인연(父子之因緣)이라는 것을 마음과 몸으로 체휼하게 될 때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 볼 수 있다.
심정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것을 실생활에서 사무치게 느껴 생활하는 자가 아니면 타락성(墮落性)을 벗을 수 없다.
하늘의 심정을 중심삼고 움직이는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심정으로 무장된 생활을 중히 여겨라. 나보다 심정적인 사람은 나의 아벨이다.
말씀시대나 실체시대는 대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심정시대는 대신이 없다.
말씀의 목적은 실체요, 실체의 목적은 심정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할 때 하늘의 심정을 전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하며, 말씀을 듣는 사람도 그 말씀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을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끝날에 있어 종교는 심정종교(心情宗敎), 철학은 심정철학(心情哲學), 주의는 심정주의(心情主義), 사상은 심정사상(心情思想)으로 각각 해명되어야 한다.
심정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종교는 하나님이 제일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실감(實感)있게 가르쳐 주는 종교이다.
때가 요구하는 심정 앞에 먼저 선 자가 그 심정을 잃으면 늦게 들어오더라도 그 심정기준이 된 자를 불러 쓸 수밖에 없다.
심정의 왕자가 못 되면 권세의 왕자도 못 된다.
복의 영원한 고향은 하나님의 심정이므로 하나님의 심정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사람이 되어야 그곳에 하나님의 복이 운행한다.
경천(敬天), 인화(人和), 애지(愛地)의 내적인 심정기준이 흔들리지 않는 자가 복된 자이다.
모심의 생활을 통하여 하늘을 반하게 하는 자는 언제나 하늘이 지도해 준다. 이런 아들 딸이 하늘의 눈동자이다.
사랑은 주고 잊어버려라.
사랑은 작용(作用)하면 할수록 커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서만 영생이 나오는 것이다.
선(善)한 사람의 길은 극복(克服)해 가는 생활이다.
인간이 최고의 것을 바라는 것은 본래 최고의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앞에는 높고 낮은 것이 없다.
항상 하늘 앞에 목메이는 때가 많아야 한다.
사랑의 뿌리는 하나님이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이 완전히 하나가 되면 그 중앙에 하나님이 임재(臨在)하신다.
소원의 일치와, 사정의 일치가 되어야 심정세계가 벌어진다. 심정의 원천이 될 자료(資料)를 가지자.
하늘 앞에 지성(至誠)을 드리는 것은 남으로부터 듣거나 배우거나 끌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자동적으로 심정에서 우러나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忠), 효(孝), 열(烈)은 가르쳐 주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정성(精誠)을 다해 가지고 하나님의 신세를 지지 않고 오히려 신세를 끼쳐 드리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나가야 한다.
주기에 굶주린 자가 되자. 절대로 신세지지 말라.
심정을 유린(蹂躪)한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요, 사탄도 죄악시(罪惡視)한다.
심정을 중심삼고 그 인격 앞에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성품을 흡수할 수 있는 소성(素性)을 갖추어야 한다. 부활은 사랑의 봄동산에서 모든 세포(細胞)가 녹아나는 것 같은 깊은 사랑의 인연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모든 성품을 흡수할 수 있는 소성(素性)을 갖추어야 한다. 부활은 사랑의 봄동산에서 모든 세포(細胞)가 녹아나는 것 같은 깊은 사랑의 인연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심정을 유발(誘發)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정성들이는 것이며, 3대(三代)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들이면 하나님이 같이하시어 그 후손이 망하는 법이 없다.
자기의 자식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자기의 쓰라림보다 하늘 아버지의 쓰라림이 어떠하겠는 가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심정을 가진 자에게는 하늘도 꼭 너희들의 형님을 본받아라!’ 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은 심정 문제다.
심정은 생명의 원천이다. 이것은 그대로 영계에 직결된다.
나는 너희들과 같지 않다는 심정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하늘의 애달픈 심정을 대신하여 서러워하던 것의 세 배 이상의 애달픈 마음을 가져라.
하나님의 심정에는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잃어버린 슬픔과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선지 선열들을 보내어 사탄과 싸우게 하신 역사적 슬픔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도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생애를 바쳐 싸우고 죽었으니, 우리도 예수의 심정을 대신하여 증거하고 싸우며 죽는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어머니를 찾는 어린아이의 심정이 있으면 하늘길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갈 수 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 느꼈던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적 내연(內緣)을 능가해야 기쁨이 있을 수 있다.
완전한 사랑은 준 후에도 기억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자리이다.
모든 문제를 아버지의 심정에 걸어 놓고서 생각하면 풀리지 않는 것이 없다.
상대기준(相對基準)이라는 말은 심정을 두고 한 말이다. 완성이라는 것도 바로 심정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다.
고통의 사정을 알리고 싶지 않고 슬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늘은 덮어 내려오신 것이다.
통일 신도가 가져야 할 오직 하나의 소유관념은 하나님의 심정이다.
세상의 일은 적당히 넘어갈 수 있지만, 심정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안된다.
향수(鄕愁)와 같은 심정의 역사를 꾸며 놓자.
사랑의 근본은 부자지정(父子之情)의 종적인 사랑과 형제지정(兄弟之情)의 횡적인 사랑이다.
심정의 경지에서는 잘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못난 사람이 없다.
심정의 세계는 시공(時空)을 초월한다. 말씀도, 기도도 궁극에는 사랑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싶거든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싶거든 하나님을 사랑하라.
사랑은 통일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통일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