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정성의 자리에서 자신을 갖추어 전체 앞에 보여 주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정성의 예물
문선명, 1967년 1월 29일(일), 전 본부교회
연설에서 인용
세상에 어떤 역사적인 결실을 남기고, 혹은 그 시대에 있어서 남다른 실적을 거두어 후대의 표본으로 남기고, 또 후손들이 본받을 수 있는 모체로 남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성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작거나 혹은 크거나 간에 역사적인 사건의 배후에는 일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성어린 과정이 있고, 그러한 과정을 거친 결과만이 역사적인 면에서나 시대적인 면에서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성의 예물’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성들이는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즉 일편단심을 지녀야 합니다. 두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통일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정성은 누구에게 빌려 주었다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이나, 과정이나, 끝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되어서는 정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편단심, 통일된 마음을 중심삼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자기를 위주로 한 것이 되면 정성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성은 나를 위주로 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즉 가정이면 가정, 사회면 사회, 국가면 국가 등 더 큰 상대를 위해 들여야만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정성들인 것은 자기 일대에 있어서는 남아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 일대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정성의 터전은 상대를 위한 것만이 남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의 크기에 따라서 정성을 들인 실적이나 인연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체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를 위주로 하는 데서가 아니라 반드시 상대를 위하는 데서 정성의 요건이 성립되고,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신하가 자기의 군주를 위해서 정성들이게 될 때 거기에 효, 열, 충이란 명사가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대를 넘어서 역사와 더불어 인연 맺어지기 때문에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런 기준을 존경하고, 그런 인연을 추앙하게 된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자기를 위주로 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마음을 터전으로 하여 일편단심,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상대를 위해야만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정성이란 명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일편단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성들였다, 충성했다 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상대 세계를 위하는 데 있어서 예기치 못한 불상사나 반대작용이 일어날 수 있고,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더불어 인내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내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안팎, 사방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나게 될 때는 그것을 잘라 버릴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하고 반드시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오늘날 객관적으로 관찰해 볼 때 인류역사는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일관된 목적성을 지닌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투쟁의 역사 배후에는 정성들인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정성은 자기의 어떤 사상을 중심삼은 것입니다. 자기의 온갖 정성과 마음과 사랑을 상대 세계에 투입시켰을 때, 그 노력과 인내와 투쟁의 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늘날 현실적인 환경 혹은 사회적인 모든 제도가 우리가 필요로 해서 있는 것이라 할진대 그 배후에는 이런 인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내가 정성을 들여야 하고, 정성을 지닌 자신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편단심, 즉 통일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상대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랑의 마음과 일편단심의 마음이 있게 될 때 그 사람은 정성을 세워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와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정성어린 심정의 기준에 서고 정성의 가치를 올바르게 자기의 소유로 지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중심인물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구원역사가 결정되느냐? 그것은 정성의 기준을 중심삼고 결정됩니다. 하늘의 정성이 보다 높게 될 때에 사망세계에 있는 사회도 하늘의 정성 앞에 흡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더 큰 정성은 작은 정성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심은 더 큰 정성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양심의 표준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더 큰 정성을 바라고, 작은 정성보다는 큰 정성권 내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애국자가 되고, 충신이 되고, 효자, 열녀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회나 민족을 중심삼고 충성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소망합니다. 어느 누가 자기 민족, 자기 국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 차이는 있을망정 사랑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단체, 종족, 또는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어떠한 사람이 정성을 들일 때, 거기에는 대다수가 동참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로 세워진 사람들이 그 단체나 종족이나 국가의 사상적 기준을 대표해 가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환경을 정리해 나가는 방법으로 구원역사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을 구하려 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되느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마음 구석구석까지도 꽉 찬 일편단심으로…. 이렇게 구원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불의를 추방하는 일에 정성을 바쳐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어디를 가든지 인간적인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들의 주위에 어떤 어려운 환경과 원수들의 총칼이 모여든다 해도 참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뼈 없는 사나이로 참아서는 안 됩니다. ‘두고 보자. 어느 한 때에 내가 갖춘 모습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시련의 환경은 결국 종결될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정성어린 예물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복귀노정에서 이 민족 앞에 제시된 모든 여건들을 여러분 자체의 실적으로 여겨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 모든 실적을 합하고 뭉쳐서 하늘 앞에 정성어린 터전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충성할 수 있는 통일교회로서 대한민국을 능가할 수 있는 터전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여러분들을 어려운 여건과 환난 가운데 부딪치게 한 제1차적인 이유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정성은 어디서부터 그 효과가 빨리 나타나느냐?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에서 피리를 불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정성을 들인다면 그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눈물이 감돌고 피비린내가 나고 피골이 상접하는 역경 가운데서 들이는 그 하루의 정성은 편안한 때의 십년, 백년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에 우리들은 스스로 편안한 자리를 저버리고 반대의 길을 가기에 몸부림쳐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왜? 하늘의 정성어린 눈물 앞에 우리의 지극한 정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가 비록 어떠한 실적은 가지고 있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정성어린 마음과 충성하는 간곡한 심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아들딸이 되지 못했으면, 이 민족 중에서 그런 아들딸을 찾아내는 심부름꾼이라도 되어 그들을 아버지 앞에 인도하고 나서 자기 스스로 아버지를 한번 불러 보자는 것입니다.
하늘 앞에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지방에서 어떤 식구가 사과 하나를 선생님께 가져왔더라도 선생님은 함부로 손대지 않습니다. 정성들인 것을 잘못 건드리게 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편단심의 심정과 하나님의 최고의 노력을 무시하게 되면 천륜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이 정성들인 물건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백 만큼의 정성을 들인 물건이라면 110만큼의 정성을 들여야 대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의 책임자가 정성들인 것을 받아서 하늘 앞에 연결시키지 못하게 되면 정성들인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빨리 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령한 집단들이 자기 당대는 영화로울지 모르나 천도를 넘어서는 일이 많아 곧 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륜의 법도는 여러분의 생활에 있어서 공식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금 걷고 있는 생의 노정과 살고 있는 생활환경 역시 불가피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보다는 나라를 위해서, 나라보다는 세계를 위해서 눈물 흘려야 합니다. 대한민국, 한민족, 배달(倍達)민족이라고 하는 이 민족이 없어지더라도 세계는 남아져야 합니다.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희망하는 세계 인류로 남아져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 정성을 못 들이더라도 세계를 위해 정성들이고, 세계를 위해 정성을 못들여도 하나님을 위해 정성들여야 합니다.
앞으로 참다운 아들딸들이 들여야 할 정성은 무엇이냐? 현실적인 생활 무대에서의 정성이 아니라 소망의 정성, 영광의 정성, 충성의 정성, 모심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한 정성을 남기고 가야만 천국이 내 천국이 되고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정성은 탕감도상에서의 정성이었지만, 앞으로의 정성은 하늘을 모시기 위한 정성이어야 하고, 모시는 자리에 동참하기 위한 정성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동참하는 우리는 첫째 부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심의 자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슬퍼해 나오셨던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고, 슬픈 정성의 사연에 동참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을 소개하고 그에 따르는 탕감조건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하여 나온 것이 복귀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어떻게 어떻게 했다.’라는 말은 버려야 합니다. ‘내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얼마나 일했는데…. 내가 주인이 되면 뭘 하겠다.’라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자기 갈 길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고 탄식하는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조건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여러분에게서 오늘 당장 이러한 마음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가로막힌 원수의 적진을 파괴해 버리고 승리자의 영광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신념이 얕은 사람은 앞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주체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념을 앞세우고 쉬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말아야.
선생님은 하나님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성격을 대번에 뛰려고만 하게 해 놓았다면 죽든가 살든가 무슨 사고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일정한 고개에 오르게 되면 못 가게 막아 놓고 준비하게 하십니다. 거쳐야 할 단계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 고개를 쉽게 넘지 못하더라도 절대 낙망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지난날의 산 증거가 확실하게 역사적인 재료가 됩니다. 다 올라가서 졸라맨 허리띠를 풀어놓으면 많은 핍박과 시련이 옵니다. 한번 넘어지면 한번 일어서는 것이 공식이기 때문에 많은 핍박과 시련을 거치고 나면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웃는 날을 일주일 이상 가져서는 안 됩니다. 좋은 날이 있거든 ‘하나님, 요건 며칠 가게 하시렵니까?’ 하고 기도를 해서 하나님께 약속을 받고 웃어야 합니다. 그런 기도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배경과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위치와 자기의 중심 기준을 갖춘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정성의 줄을 끊을 수 있는 천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무에 오르기 시합을 한다고 광고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욕심 많은 통일교인들은 제일 큰 나무에 서로 올라가려고 싸우다가 끝내 싸움이 끝나지 않은 채 실적 없이 시합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욕심만 크고 실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재치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알맞은 나무를 먼저 찾아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사람은 자기 분수에 넘치는 제일 높은 나무를 올라가려다가 떨어지고 맙니다. 우선 차근차근 올라가서 하나하나 기준을 세워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크게 출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착실히 실적을 세우며 자기 본질에 해당되는 충성만큼의 정성을 기울여, 하늘이 쌓아 온 정성의 예물의 기준을 지니고 천고(千古)에 남겨질 수 있는 자리에 섰다면 여러분 당대에는 그 소망하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여러분 후대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에 대해서 남겨질 수 있는 정성의 터전을 지니고 나가면 자신과 후손의 명성이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까닭 없이 맞았으면 손해배상을 받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서도 다리를 펴고 코를 골며 잠만 잤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삼키지 못할 때는 수가 난다 이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려니 때로는 남루해야 하기도 했고, 때로는 손가락질 받아야 했습니다. 이 길을 개척하면서 가지가지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풍상을 겪어 나오셨는데 내 어이 이만한 풍상을 겪지 않으리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세계를 몇 개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약속을 해놓고 정성을 들이고 나서야 하나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정성의 문을 거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도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