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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인간은 누구나 불행을 물리치고 행복을 찾아 이루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개인의 사소한 일로부터 역사를 좌우하는 큰 일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결국 하나같이 보다 행복해지려는 삶의 표현인 것이다.

Everyone is struggling to attain happiness and avoid misfortune. From the commonplace affairs of individuals to the great events that shape the course of history, each is at root an expression of the human aspiration for ever greater happiness.

욕망

그러면 행복은 어떻게 될 때 오게 되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본의(本意)를 흐려서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그 욕망이 선(善)보다도 악(惡)으로 나아가기 쉬운 생활환경 가운데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不義)를 맺는 욕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심(本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심은 이러한 욕망이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악을 지향하는 욕망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어두움을 헤치고 생명의 빛을 찾아 고달픈 길을 더듬고 있는 인생이다.

How, then, does happiness arise? People feel joy when their desires are fulfilled. The word “desire,” however, is often not understood in its original sense, because in the present circumstances our desires tend to pursue evil rather than good. Desires which result in injustice do not emanate from a person’s original mind. The original mind is well aware that such desires lead to misfortune. Therefore, it repels evil desires and strives to follow the good. Even at the cost of their lives, people seek for the joy that can enrapture the original mind. This is the human condition: we grope along exhausting paths to cast off the shadow of death and search for the light of life.

불의의 욕망을 따라가서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누려 본 사람이 어디에 있었던가? 인 간은 누구나 그러한 욕망을 채울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민하게 된다. 자식에게 악을 가르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제자에게 불의를 넣어 주는 스승이 어디 있을 것인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심의 발로이다.

Has anyone realized the joy in which the original mind delights by pursuing evil desires? Whenever such desires are sated, we feel unrest in our conscience and agony in our heart. Would a parent ever instruct his child to be evil? Would a teacher deliberately instill unrighteousness in his students? The impulse of the original mind, which everyone possesses, is to abhor evil and exalt goodness.

특히 이러한 본심(本心)이 지향하는 욕망을 따라 선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도인(道人)들의 생활이지만, 유사이래 그 본심대로만 살다 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 : 10∼11)라고 하였으며, 또 인간의 이러한 참경(慘境)에 직면하였던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 : 22∼24)라고 개탄하였던 것이다.

In the lives of religious people one can see an intense struggle to realize goodness by single-mindedly following the desires of the original mind. Yet since the beginning of time, not even one person has abided strictly by his original mind. As St. Paul noted, “None is righteous, no, not one; no one understands, no one seeks for God” (Rom. 3:10-11). Confronted with the human condition, he lamented, “For I delight in the law of God, in my inmost self, but I see in my members another law at war with the law of my mind and making me captive to the law of sin which dwells in my members. Wretched man that I am!” (Rom. 7:22-24).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본심의 지향성과 이에 반하여 악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사심(邪心)의 지향성이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상반된 목적을 앞세우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矛盾性)을 발견하게 되었다.

We find a great contradiction in every person. Within the self-same individual are two opposing inclinations: the original mind that desires goodness and the evil mind that desires wickedness. They are engaged in a fierce battle, striving to accomplish two conflicting purposes.

욕망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안에 모순성을 갖게 될 때에는 파멸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순성을 가지게 된 인간 자체는 바로 파멸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은 당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존재도 모순성을 내포하고서 생성(生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러한 모순성을 내포한 운명적인 존재였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성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파멸상태를 일러 기독교에서는 타락(墮落)이라고 한다.

Any being possessing such a contradiction within itself is doomed to perish. Human beings, having acquired this contradiction, live on the brink of destruction. Can it be that human life originated with such a contradiction? How could beings with a self-contradictory nature come into existence? If burdened by such a contradiction from its inception, human life would not have been able to arise. The contradiction, therefore, must have developed after the birth of the human race. Christianity sees this state of destruction as the result of the human Fall.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인간이 타락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누구도 이것을 반박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타락되어 자기 파멸에 이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심으로부터 오는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따라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의 모순성을 제거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궁극(窮極)에 있어서 선과 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을 두고 볼 때, 그중의 어느 하나가 선이라고 하면 다른 하나는 악이 될 것인데, 우리는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절대적인 정설(定說)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인간들은 선의 욕망을 일으키는 본심이 무엇이고, 이 본심을 반하여 악의 욕망을 일으키는 사심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모순성을 갖게 하여 파멸을 초래케 한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 등의 문제에 대하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선의 욕망을 따라 본심이 지향하는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는 이 무지(無知)를 완전히 극복함으로 써 선악(善惡)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Can anyone dispute that the human condition is fallen? When we realize the fact that, due to the Fall, we have arrived at the brink of self-destruction, we make desperate efforts to resolve the contradiction within. We repel the evil desires coming from our evil mind and embrace the good desires springing from our original mind. Nevertheless, we have been unable to find the ultimate answer to the question: What is the nature of good and evil? We still do not have an absolute and definitive truth which can enable us to distinguish, for example, which of the two, theism or atheism, is good and which is evil. Furthermore, we remain entirely ignorant of the answers to such questions as: What is the original mind, the wellspring of good desires? What is the origin of the evil mind that incites evil desires in opposition to the original mind? What is the root cause of the contradiction that brings people to ruin? In order to ward off evil desires and follow good desires, we must overcome this ignorance and gain the ability to distinguish clearly between good and evil. Then we can take the path to the good life the original mind seeks.

인간의 타락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과 몸의 내외(內外) 양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인 면에 있어서도 내외 양면의 지(知)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지에도 내적인 무지와 외적인 무지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 내적인 무지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생(生)의 목적은 무엇이며, 사후(死後)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내세(來世)와 하나님에 대한 존재 여부, 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무지란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자연계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물질세계의 근본은 무엇이며, 그 모든 현상은 각각 어떠한 법칙에 의하여 일어나는가 하는 것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Considered from the viewpoint of the intellect, the human Fall represents humanity’s descent into ignorance. People are composed of two aspects: internal and external, or mind and body; likewise, the intellect consists of two aspects: internal and external. In the same way, there are two types of ignorance: internal ignorance and external ignorance. Internal ignorance, in religious terms, is spiritual ignorance. It is ignorance of such questions as: What is the origin of human beings? What is the purpose of life? What happens after death? Do God and the next world exist? What is the nature of good and evil? External ignorance refers to ignorance of the natural world, including the human body. It is ignorance of such issues as: What is the origin of the physical universe? What are the natural laws governing all phenomena?

무지

인간은 유사이래(有史以來) 오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무지(無知)에서 지(知)에로 극복하기 위하여 진리를 찾아 나왔다. 그리하여 내적인 무지에서 내적인 지에로 극복하기 위하여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종교(宗敎)요, 외적인 무지에서 외적인 지에로 극복하기 위하여 외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과학(科學)이다. 이와 같이 알고 보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에서 양면의 지에로 극복하기 위하여 양면의 진리를 찾아 나온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무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가지고 본심의 욕망이 지향하는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는,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 내외 양면의 진리가 상통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From the dawn of history until today, human beings have ceaselessly searched for the truth with which to overcome both types of ignorance and attain knowledge. Humanity through religion has followed the path of searching for internal truth, and through science has followed the path of seeking external truth. Religion and science, each in their own spheres, have been the methods of searching for truth in order to conquer ignorance and attain knowledge. Eventually, the way of religion and the way of science should be integrated and their problems resolved in one united undertaking; the two aspects of truth, internal and external, should develop in full consonance. Only then, completely liberated from ignorance and living solely in goodness in accord with the desires of the original mind, will we enjoy eternal happiness.

무지

인생의 실제에 있어서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을 두 가지로 대별(大別)하여 본다면, 첫째는 물질로 된 이 결과의 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길이다. 이러한 길을 지상(至上)으로 생각하고 걸어온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된 과학 앞에 굴복하여 과학의 만능과 물질적인 행복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러한 육신을 중심한 외적인 조건만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과학의 발달이 아무리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루고 그 속에서 아무리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린다 한들 그것으로써 어찌 속사람의 정신적인 욕구까지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육신의 낙(樂)을 즐기는 속인(俗人)의 기쁨은 청빈(淸貧)을 즐기는 도인(道人)의 기쁨에 미칠 수 없으리라.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 없는 구도(求道)의 행각을 즐긴 것은 비단 석가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에 있어서 마음이 있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기쁨에 있어서도 마음의 기쁨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몸의 기쁨도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육신의 낙을 찾아 과학의 돛을 달고 물질세계를 항해하는 사공이 있는가? 그가 이상(理想) 하는 그 언덕에 닿아 보라. 그곳이 바로 그 육신을 묻어야 할 뫼인 것을 알게 되리라.

We can discern two broad courses in the search for solutions to the fundamental questions of human life. In the first, people have searched within the resultant, material world. Those who walk this path, believing it to be the supreme way, kneel before the glories of highly developed science. They take pride in its omnipotence and the material comforts it provides. Nevertheless, can we enjoy full happiness founded only upon external conditions that satisfy the flesh? The advance of science may create a comfortable social environment in which we can enjoy abundant wealth and prosperity, but can that alone truly gratify the spiritual desires of the inner self? The passing joys of those who delight in the pleasures of the flesh are nothing compared to the bliss experienced by those on the path of enlightenment, who find joy in the midst of simple poverty. Gautama Buddha, who abandoned the luxuries of the royal palace and became enraptured in the pursuit of the Way, was not the only one who wandered about homeless while searching for his heart’s resting place. Just as a healthy body depends upon a sound mind, so too the joy of the body is complete only when the mind is content. What of the sailor who voyages on the sea of the material world under the sail of science in search of physical comforts? Let him reach the coast for which he longs. He eventually will come to realize that it is nothing more than the very graveyard where his body will be buried.

그러면 이제 과학(科學)의 갈 곳은 어디일 것인가? 지금까지의 과학의 연구 대상은 내적인 원인의 세계가 아니고 외적인 결과의 세계였으며, 본질(本質)의 세계가 아니고 현상(現象)의 세계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그의 대상은 외적이며 또한 결과적인 현상의 세계에서 내적이며 또한 원인적인 본질의 세계에로 그 차원을 높이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그 원인적인 심령세계(心靈世界)에 대한 논리, 즉 내적 진리가 없이는 결과적인 실체세계(實體世界)에 대한 과학, 즉 외적 진리도 그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제 과학의 돛을 달고 외적인 진리의 항해를 마친 사공이 또 하나의 종교의 돛을 달고 내적인 진리의 항로에로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그는 본심이 지향하는 이상향(理想鄕)에로 항행(航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Where is science heading? Until now, scientific research has not embraced the internal world of cause; it has limited itself to the external world. It has not embraced the world of essence, but has limited itself to the world of phenomena. However, science today is entering a new phase. It is compelled to elevate its gaze from the external and resultant world of phenomena to the internal and causal world of essence. The scientific world has begun to recognize that science cannot achieve its ultimate goals without a theoretical explanation of the causal, spiritual world. When the sailor, who has completed his voyage in search of external truth under the sail of science, adds another sail, the sail of religion, and embarks on a new voyage in search of internal truth, he finally will be headed toward the destination for which his original mind yearns.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의 그 둘째는 결과적인 현상세계(現象世界)를 초월하여 원인적인 본질세계(本質世界)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밟아 온 이제까지의 철학이나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신적인 짐을 지워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철인(哲人)들과 성현(聖賢)들은 인생의 갈 길을 열어 주려고 각각 당시대에 있어서 선구적인 개척의 길로 나섰던 것이었으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모두 오늘의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The second course of human endeavor is the attempt to answer the fundamental questions about human life by transcending the resultant world of phenomena and searching in the world of essence. Undeniably, philosophies and religions which have pursued this path have made many contributions. Philosophers, saints and sages set out to pave the way of goodness for the people of their times. Yet so many of their accomplishments have become added spiritual burdens for the people of today.

이제 다시 냉철히 생각해 보자. 어느 철인이 우리의 고민을 풀어 주었으며, 어느 성현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우리의 갈 길을 뚜렷이 보여 주었던가? 그들이 제시한 주의(主義)와 사상(思想)이란 것은 도리어 우리들이 해결하고 가야 할 잡다한 회의(懷疑)와 수많은 과제들을 제기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어둠 속에서 헤매던 당시대의 많은 심령(心靈)들에게 비춰 주던 소생(蘇生)의 빛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어느덧 꺼져 버리고, 이제는 타다 남은 희미한 불똥만이 그들의 잔해를 드러내고 있다.

Consider this objectively. Has any philosopher ever arrived at the knowledge that could solve humanity’s deepest anguish? Has any sage ever clearly illuminated the path by resolving all the fundamental questions of human life and the universe? Have not their teachings and philosophies raised more unsettled questions, thus giving rise to skepticism? Furthermore, the lights of revival which religions of every age cast upon the many souls who were groping in the darkness have faded with the onward flow of history. They have left only dim, sputtering wicks glimmering in the falling darkness.

온 인류의 구원(救援)을 표방하고 2천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게 된 기독교(基督敎)의 역사를 들추어 보라. 로마제국의 그 잔학무도(殘虐無道)한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힘찬 생명의 불길을 던져, 로마인들로 하여금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던 기독정신(基督精神)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이윽고 중세 봉건사회(中世封建社會)는 기독교를 산 채로 매장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무덤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절규하는 종교개혁(宗敎改革)의 봉화는 들렸었으나, 이 불길도 격동하는 어둠의 물결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에클레시아(ecclesia)의 사랑이 꺼지고 자본주의의 재욕(財慾)의 바람이 유럽의 기독교 사회를 휩쓸어 기아(饑餓)에 허덕이는 수많은 서민들이 빈민굴에서 아우성을 칠 때, 그들에 대한 구원의 함성은 하늘이 아닌 땅으로부터 들려 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共産主義)다.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짖고 나선 기독교가 그 구호만을 남긴 에클레시아의 잔해로 돌아갔을 때, 거기에서 그렇게 무자비한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반기가 들렸던 사실은 있을 만하기도 하다.

Examine the history of Christianity. Professing the salvation of humankind, Christianity has expanded through a tumultuous history of two thousand years, extending its influence throughout the world in the present era. Yet what has become of the Christian spirit that once cast flames of life so brilliant that, despite the most brutal persecution by the Roman empire, Roman citizens were brought to their knees before the crucified Jesus? Medieval feudal society buried Christianity alive. Even though the Reformation raised high the torch of new life, its flame could not turn back the sweeping tide of darkness. When ecclesiastic love waned, when waves of capitalistic greed surged across Christian Europe, when starving masses cried out bitterly in the slums, the promise of their salvation came not from heaven but from the earth. Its name was communism. Christianity, though it professed the love of God, had degenerated into a dead body of clergy trailing empty slogans. It was then only natural that a banner of rebellion would be raised, arguing that a merciless God who would allow such suffering could not exist. Hence, modern materialism was born.

이렇게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유물사상(唯物思想)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사회는 유물사상의 온상이 되었다. 공산주의는 이 온상에서 좋은 거름을 흡수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저들의 실천을 능가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저들의 이론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를 제시하지 못한 기독교는, 저들이 바로 자기의 품속에서 싹트고 자라서 그 판도를 세계적으로 넓혀 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니 이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뿐 아니라 온 인류가 한 부모의 후예(後裔)임을 교리로써 가르치고 또 그와 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국가의 바로 그 국민들이 다만 피부의 빛깔이 다름을 인하여 그 형제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게 된 현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실천력을 잃어버리고 회칠한 무덤같이 형식화해 버린 현하(現下) 기독교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Western society became a hotbed of materialism; it was the fertile soil in which communism flourished. Christianity lost the ability to equal the successes of either communism or materialism and failed to present the truth that could conquer their theories. Christians watched helplessly as these ideologies budded and thrived in their midst and expanded their influence all over the world. What a pity this is! What is more, although Christian doctrine teaches that all humanity descended from the same parents, many citizens of Christian nations who profess this doctrine will not even sit together with their brothers and sisters of different skin colors. This illustrates the actual situation of today’s Christianity, which has lost much of the power to put the words of Jesus into practice. It has become a house of lifeless rituals, a whitewashed tomb.

이와 같은 사회적인 비극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서는 종식될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사회악(社會惡)이 또 있다. 음란(淫亂)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리는 이것을 죄 중의 가장 큰 죄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오늘의 기독교 사회가 현세인들이 몰려가는 이 윤락(淪落)의 길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눈물겨운 실정인가!

There may come a day when human efforts bring an end to such social evils, but there is one social vice that human efforts alone can never eradicate. That is sexual immorality. Christian doctrine regards this as a cardinal sin. What a tragedy that today’s Christian society cannot block this path of ruin down which so many people are rushing blindly!

이와 같이 오늘의 기독교(基督敎)가 이러한 세대의 흐름 가운데서 혼돈되고 분열되어, 패륜(悖倫)의 와중(渦中)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생명들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바로 종래의 기독교가 현대 인류에 대한 구원섭리(救援攝理)에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 입장에 있는가 하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Christianity today has fallen victim to confusion and division, and it can only watch helplessly while countless lives are sucked into the maelstrom of immorality. This is evidence that conventional Christianity stands powerless to carry on God’s providence to save humanity in this present age.

그러면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오던 종교인(宗敎人)들이 오늘에 이르러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본질세계(本質世界)와 현상세계(現象世界)와의 관계는 비유컨대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아서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그리고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마치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합해야만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본질과 현상의 두 세계도 완전히 합치되어야만 이상세계(理想世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마음과 몸이 그러하듯이 본질세계를 떠난 현상세계가 있을 수 없고, 현상세계를 떠난 본질세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現實)을 떠난 내세(來世)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육신의 행복이 없이 그의 심령적(心靈的)인 기쁨도 있을 수 없다.

What is the reason that religious people, though earnestly searching for internal truth, have been unable to accomplish their God-given missi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world of essence and the world of phenomena can be compared to that between mind and body. It is a relationship of cause and result, internal and external, subject partner and object partner (cf. Creation 1.1). Just as people attain perfection of character only when the mind and body are fully united, the two worlds of essence and phenomena must join in perfect harmony before the ideal world can be realized. As with the relationship between mind and body, so too the world of phenomena cannot exist apart from the world of essence, and the world of essence cannot exist apart from the world of phenomena. Accordingly, life after death is inseparably linked to life in this world. Spiritual joy is incomplete without genuine physical happiness.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宗敎)는 내세를 찾기 위하여 현실을 부정하기에 필사적이었으며, 심령적인 기쁨을 위하여 육신의 행복을 멸시하기에 몸부림쳐 왔다. 그러나 끊어 버리려야 끊어 버릴 수 없는 현실과, 떼어 버리려야 떼어 버릴 수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육신적인 행복욕(幸福慾)은 집요하게 도인(道人)들을 붙들어 오뇌(懊惱)의 골짜기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인들의 도(道)의 생활에도 이러한 모순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모순성을 내포한 도인생활의 파멸, 이것이 바로 오늘의 종교인들의 생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자가당착(自家撞着)을 타개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 현대의 종교가 무위화(無爲化)한 주요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Religions have made strenuous efforts to deny life in this world in their quest for the life eternal. They have despised the pleasures of the body for the sake of spiritual bliss. Yet however hard they may try, people cannot cut themselves off from the reality of this world or annihilate the desire for physical pleasures, which follows them like a shadow and cannot be shaken off. This world and its desires tenaciously grab hold of religious people, driving them into the depths of agony. Such is the contradiction which plagues their devotional lives. Even many enlightened spiritual leaders, still torn by this contradiction, have met a sad end. Herein is a principal cause for the inactivity and weakness of today’s religions: they have not overcome this self-contradiction.

이제 종교가 이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된 또 하나의 주요한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지성(知性)이 최고도로 계발(啓發)된 나머지 현대인은 모든 사물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종교의 교리에는 그의 과학적인 해명이 전적으로 결여(缺如)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진리가 서로 일치된 해명을 가지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Another factor has fated religions to decline. In step with the progress of science, the human intellect has become highly sophisticated, requiring a scientific approach to understanding reality. The traditional doctrines of religions, on the other hand, are largely devoid of scientific explanations. That is to say, the current interpretations of internal truth and external truth do not agree.

종교(宗敎)의 궁극적인 목적은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앎이 없이는 생길 수 없다. 우리가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것도 결국은 진리를 알아서 믿음을 세우기 위함이요, 예수님이 오셔서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행하심도 그가 메시아 됨을 알려서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곧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간은 논리적이며 실증적인 것 즉 과학적인 것이 아니면 인식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알아 가지고 믿는 데까지 이를 수도 없게 되어 결국 종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적인 진리에도 논증적인 해명이 필요하게 되어, 종교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통하여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시대를 추구해 나왔던 것이다.

The ultimate purpose of religion can be attained only when one first believes it in one’s heart and then puts it into practice. However, without first understanding, beliefs do not take hold. For example, it is in order to understand the truth and thereby solidify our beliefs that we study holy scriptures. Likewise, it was to help the people understand that he was the Messiah, and thereby lead them to believe in him, that Jesus performed miracles. Understanding is the starting point for knowledge. Today, however, people will not accept what is not demonstrable by the logic of science. Accordingly, since religions are now unable to guide people even to the level of understanding, much less to belief, they are unable to fulfill their purpose. Even internal truth demands logical and convincing explanations. Indeed, throughout the long course of history, religions have been moving toward the point when their teachings could be elucidated scientifically.

이와 같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無知)를 타개하기 위한 사명을 각각 분담하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상충하여 서로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상(樣相)을 보여 왔으나, 인간이 그 양면의 무지를 완전히 극복하여 본심이 요구하는 선(善)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자면, 어느 때든지 과학을 찾아 나온 종교와 종교를 찾아 나온 과학을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주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Religion and science, setting out with the missions of dispelling the two aspects of human ignorance, have seemed in the course of their development to take positions that were contradictory and irreconcilable. However, for humankind to completely overcome the two aspects of ignorance and fully realize the goodness which the original mind desires, at some point in history there must emerge a new truth which can reconcile religion and science and resolve their problems in an integrated undertaking.

새 진리

새 진리(眞理)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 신도들에게는 못마땅하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서가 이미 그것만으로써 완전무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유일(唯一)하고 영원불변(永遠不變)하며 절대적(絶對的)이다. 그러나 경서란 진리 자체가 아니고 진리를 가르쳐 주는 하나의 교과서로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로 그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져 온 각 시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를 따라서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교과서마저 절대시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전편 제3장 제5절 참조).

It may be displeasing to religious believers, especially to Christians, to learn that a new expression of truth must appear. They believe that the scriptures they have are already perfect and flawless. Certainly, truth itself is unique, eternal, immutable and absolute. Scriptures, however, are not the truth itself, but are textbooks teaching the truth. They were given at various times in history as humankind developed both spiritually and intellectually. The depth and extent of teaching and the method of expressing the truth naturally varied according to each age. Consequently, we must never regard such textbooks as absolute in every detail (cf. Eschatology 5).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그 본심(本心)의 지향성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아 선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방편으로 나오게 된 것이 종교(宗敎)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목적은 동일한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분야와 그를 대하는 민족에 따라,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위와 같은 이유로 그 경서를 서로 달리하게 되는 데서 필연적으로 각양각이(各樣各異)한 종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서란 진리의 빛을 밝혀 주는 등잔과 같아서 주위를 밝힌다는 사명은 동일하지만, 보다 밝은 등불이 나올 때는 그것으로써 낡은 등잔의 사명은 끝나는 것이다.

People need religion in order to seek the Ultimate Reality and realize goodness in accordance with the inclination of the original mind. Thus, the purpose of every religion is identical. However, religions have appeared in different forms according to their various missions, the cultures in which they took root, and their particular historical period. Their scriptures have taken different forms for similar reasons. All scriptures have the same purpose: to illuminate their surroundings with the light of truth. Yet when a brighter lamp is lit, the old lamp is outshone and its mission fades.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오늘의 어떠한 종교도 현세인(現世人)들을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생명의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새 빛을 발하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실 것은 성서(聖書) 가운데에도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전편 제3장 제5절 참조).

Because religions lack the power to guide modern people out of the dark valley of death into the full radiance of life, there must emerge a new expression of truth that can radiate a new and brighter light. Jesus indicated that God would someday reveal a new truth: “I have said this to you in figures; the hour is coming when I shall no longer speak to you in figures but tell you plainly of the Father” (John 16:25).

그러면 그 새 진리(眞理)는 어떠한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인가? 이 진리는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 종교가 찾아 나온 내적 진리와 과학이 찾아 나온 외적 진리를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내외 양면의 무지(無知)에서 내외 양면의 지(知)에로 완전히 극복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사심(邪心)이 지향하는 그 악의 길을 막고 본심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 선의 목적을 이루게 함으로써, 선악(善惡) 양면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과 위에서 이미 논한 바 종교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도(道)의 생활의 모순성을 극복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타락인간에 있어 앎은 생명의 빛이요 또한 소생의 힘이 된다. 그리고 무지는 사망의 그늘이요 또한 파멸의 요소인 것이다. 무지에서는 어떠한 정서(情緖)도 일어날 수 없으며, 무지와 무정서(無情緖)에서는 어떠한 의지(意志)도 생길 수 없다.

What missions must the new truth fulfill? The new truth should be able to unify knowledge by reconciling the internal truth pursued by religion and the external truth pursued by science. Consequently, it will enable all people to overcome the two types of ignorance, internal and external, and fully comprehend the two types of knowledge. Next, the new truth should lead fallen people to block the ways of the evil mind and to pursue the goals of the original mind, enabling them to attain goodness. It should guide people to remove the double-mindedness that sometimes seeks good and sometimes evil. It should empower religious people to overcome the contradiction which they face in their struggle to live according to the Way. For fallen people, knowledge is the light of life holding the power of revival, while ignorance is the shadow of death and the cause of ruin. Ignorance cannot beget true sentiments, and in the absence of knowledge and emotion the will to act cannot arise.

이렇듯 인간에게 있어 지(知)·정(情)·의(意)가 제구실을 못 하게 될 때에는, 거기에 인간다운 인간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가지고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實在性)에 대하여는 성서를 보아도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心情)에 대해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반역하는 타락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유구(悠久)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구원(救援)하시려고 애써 오신 애달픈 심정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Without the proper functioning of emotion, intellect and will, one cannot live the life of a true human being. If we are created in such a way that we cannot live apart from God, then surely our ignorance of God consigns us to walk miserable paths. Though we may diligently study the Bible, can we really say that we know clearly the reality of God? Can we ever grasp the Heart of God? The new expression of truth should be able to reveal the Heart of God: His heart of joy at the time of creation; the broken heart He felt when humankind, His children whom He could not abandon, rebelled against Him; and His heart of striving to save them throughout the long course of history.

선과 악의 두 면을 지향하는 인간들의 상충적인 생활로써 형성되어 온 인류역사는 거의 싸움으로 엮어져 내려왔다. 그 싸움은 바로 재물 빼앗기 싸움, 땅 빼앗기 싸움, 그리고 사람 빼앗기 싸움 등의 외적인 싸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이러한 외적인 싸움은 점차로 종식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민족의 차별이 없이 한데 모여 한 국가를 이루고, 이제는 도리어 전승국가(戰勝國家)들이 식민지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열강(列强)들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여 유엔의 회원국가가 되게 함으로써, 함께 세계정부(世界政府)의 실현을 도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국제관계가 하나의 경제문제를 중심하고 완화되어 더불어 하나의 공동시장체제를 형성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오늘날 문화면에서는, 각 민족의 전통적인 이질성(異質性)을 극복하고 동서양(東西洋)의 거리를 초월하여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서로 유통(流通)하고 있는 형편이다.

Human history, woven of the lives of people who are inclined toward both good and evil, is filled with struggle. Today, external conflicts – battles over property, people and territory – are gradually diminishing. People are coming together transcending the differences between races. The victors of World War II liberated their colonies, gave them equal rights with the great powers and included them as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Together, they are working toward a world order. Hostility and discord in international relations have been mitigated as economic concerns come to the forefront and nations are cooperating to construct common markets. Culture is freely circulating, the traditional isolation of nations is being overcome and the cultural distance between East and West is being bridged.

그러나 우리 앞에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이 하나 남아 있으니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民主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와의 내적인 이념(理念)의 싸움이다. 그들은 서로 무서운 무기를 마련하고 외적인 싸움을 겨루고 있으나, 그 실은 내적인 이념의 싸움의 판가리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최종적인 이념의 싸움에 누가 승리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주주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오늘의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를 굴복시킬 수 있는 아무런 이론도 실천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가 완전히 이루어지려면 바로 이 새 진리가 지금까지 민주주의세계에서 주창해 온 유심론(唯心論)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켜 유물론(唯物論)을 흡수함으로써 온 인류를 새 세계에로 옮겨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진리는 역사 이래의 모든 주의나 사상은 물론 모든 종교까지도 하나의 길로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Nonetheless, one final and inescapable conflict remains before us, the war between democracy and communism. Although each side has equipped itself with fearsome weapons and is pitted against the other in readiness for battle, the core of their conflict is internal and ideological. Which side will triumph in this final ideological conflict? Anyone who believes in the reality of God will surely answer that democracy will win. However, democracy does not possess any doctrine which can win over communism, nor does it have the power to do so. Therefore, in order for God’s providence of salvation to be completely fulfilled, this new truth should first elevate the idealism of the democratic world to a new level, then use it to assimilate materialism, and finally bring humanity into a new world. This truth must be able to embrace all historical religions, ideologies and philosophies and bring complete unity among them.

인간이 종교를 믿지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實在)와 내세(來世)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적(靈的)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만 한다면 믿으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本性)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에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을 세우고 나아가는 그 누구도 마침내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역시 인간의 천성(天性)의 발로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적인 사실에 부딪혀서 인생의 근본 목적을 현실세계에다 둘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다 두고 가야 할 것임을 깨달을 때에는, 누구나 이 한 길을 통하여 하나의 목적지에서 하나의 형제로서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Some people do, indeed, refuse to believe in religion. They disbelieve because they do not know the reality of God and life after death. Yet, however strongly they would like to deny these realities, it is human nature to accept and believe in them if they can be proven scientifically. Moreover, Heaven has implanted in human beings a nature such that those who place their ultimate purpose of life in the material world will eventually come to feel a great void and emptiness in their hearts. When people come to know God through the new truth and encounter the reality of the spirit world, they will realize that they should not set the ultimate purpose of life in the material world, but instead should look to the eternal world. They will walk the path of faith, and when they reach their final destination, they will meet as brothers and sisters.

그러면 온 인류가 하나의 진리(眞理)에 의하여 하나의 형제로서 하나의 목적지에서 만나게 된다면, 거기에서 이룩된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 것인가? 이 세계는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인생의 양면의 무지(無知)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쳐 온 인간들이 그 흑암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진리의 빛 가운데서 함께 만나 가지고 하나의 대가족(大家族)을 이룬 세계이다.

If all people are to meet as brothers and sisters by virtue of this one truth, what will that world be like? Under the light of the new truth, all those who have struggled over the long course of history to dispel the darkness of ignorance will gather. They will form one great family.

그런데 진리의 목적이 선을 찾아 이루려는 데 있고, 선의 본체가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그 진리에 의하여 도달된 이 세계는 바로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서로 형제애(兄弟愛)에 얽혀 사는 세계인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웃을 희생시킬 때에 느껴지는 불의(不義)한 만족감보다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오는 고통의 도(度)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는 결코 그 이웃을 해칠 수 없게 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형제애가 솟구칠 때, 도저히 그 이웃에 고통을 끼치는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부모가 되시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그 사회의 인간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가 인류 죄악사를 청산한 새 역사의 시대에서 이루어 놓을 새 세계는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Since the purpose of truth is to realize goodness, and since God is the origin of goodness, God will be the center of the world founded upon this truth. Everyone will adore and serve God as their Parent and live in harmony with each other in brotherly love. It is human nature that when people wrong their neighbor for selfish ends, they suffer more from the pangs of conscience than they benefit from the enjoyment of unrighteous gains. Anyone realizing this will restrain himself from hurting his neighbor. But were genuine brotherly love to overflow from the depth of people’s hearts, they would no longer wish to do anything that would cause pain to their neighbor. How much more would this be true in a society of people who actually feel that God, who transcends time and space and observes their every act, wants them to love each other? Therefore, once the sinful history of humanity has come to an end, a new historical era will begin wherein people simply will not commit sins.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성도(聖徒)들이 범죄를 하게 되었던 것은, 실상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어디까지나 관념적이요, 실감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성(存在性)을 실감하는 자리에서 범죄한 인간은 부득이 지옥(地獄)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는 천법(天法)을 안다면, 거기에서 누가 감히 죄를 범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죄 없는 세계를 천국(天國)이라 할진대,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찾아 나온 이 세계야말로 바로 그 천국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천국은 지상의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지상천국(地上天國)이 되는 것이다.

The reason why people who believe in God continue to commit sins is because their faith in God has been merely conceptual. It has not touched their innermost feelings. Who among them would ever dare to commit sin if they experienced God in the depths of their being? Would they not tremble if they felt the reality of the heavenly law that those who commit crimes cannot escape the destiny of hell? The world without sin which has just been described, this long-sought goal of humankind, may be called the Kingdom of Heaven. Since this world is to be established on the earth, it may be called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궁극적인 목적이 지상천국을 이루시려는 데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위에서 인간이 타락(墮落)되었다는 사실과 이 타락은 인간이 생성된 이후에 되어진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거니와, 이제 하나님의 실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인간 시조가 타락하기 이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이루려 하셨던 그 세계가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데 대한 답은 너무도 자명(自明)하다. 그에 관해서는 전편 제3장에서 논하겠거니와, 그 세계야말로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이루어진 지상천국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죄악세계(罪惡世界)를 이루어 무지에 떨어졌었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내 외 양면의 진리를 더듬어 이 무지를 타개하면서 선(善)을 지향하여 부단히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세계인 지상천국을 되찾아 나왔던 것이다.

We can conclude that the ultimate purpose of God’s work of salvation is to establish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It was explained above that human beings fell, and that this fall took place after the human race originated. If we accept the existence of God, then it is obvious what kind of world God originally wanted to realize before the fall of the first human ancestors. It suffices to say that this world was to be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wherein God’s purpose of creation would bear fruit (cf. Creation 3.1). Due to the Fall, human beings failed to establish this world. Instead, they fell into ignorance and built a sinful world. Since then, fallen human beings have unceasingly struggled to restore the Kingdom of Heaven on earth, the world God originally intended to create. Over the long course of history, they have sought for truth, both internal and external, and have strived to pursue goodness.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復歸)하여 나아가는 섭리역사(攝理歷史)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새 진리는 타락인간을 그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복귀과정(復歸過程)에 있는 타락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야 된다.

Thus, behind human history is God’s providence to restore a world where the purpose of God’s creation is fulfilled. Accordingly, the new truth should guide fallen human beings to return to their original state. To do this, it must reveal the purpose for which God created humankind and the universe, and teach about the process of their restoration and its ultimate goal.

새 진리

그리고 인간은 과연 성서(聖書)가 말하는 문자 그대로 선악과(善惡果)라는 과실을 따먹고 타락(墮落)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타락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또 완전완미(完全完美)하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타락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을 창조(創造)하셨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타락되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왜 그 창조의 권능을 가지고 일시에 죄악인간을 구원(救援)하지 못하시는가 하는 것 등, 실로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혀 온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Did human beings fall by eating a fruit called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as is written literally in the Bible? If not, then what was the cause of the Fall? The new truth must answer these and other questions which have pained and troubled the minds of profound thinkers throughout the ages: Why did the God of perfection and beauty create human beings with the potential to fall? Why did the omniscient and omnipotent God not prevent their fall, even though He was aware that they were falling? Why did God not save sinful humankind in an instant with His almighty power?

우리가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비장(秘藏)되어 있는 과학성을 살펴볼 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야말로 과학의 근본이기도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의 역사임이 사실일진대, 그와 같이 모든 법도(法度)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처럼 오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기간을 두시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질서하게 이 역사를 섭리해 나오셨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악역사가 어떻게 출발하여 어떠한 공식적인 섭리의 과정을 거쳐서 어떠한 모양으로 종결되어 어떠한 세계에로 들어갈 것인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긴절(緊切)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이러한 근본문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명백하게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As we marvel at the scientific laws concealed in the natural world, we can deduce that God, its Creator, truly is the very origin of science. If human history is God’s providence to restore the world wherein His purpose of creation is fulfilled, it must be that God, the Master of all laws, has led the long providence of restoration according to an orderly plan. It is our most urgent task to comprehend how the sinful history of humanity began, what formulas and laws have governed the course of the providence, how history will be consummated and, finally, into what kind of world humanity will enter. The new truth must offer answers to all of these deeper questions of life.

이러한 문제들이 명확하게 풀리게 될 때 우리는 역사를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어떠한 주체, 곧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더욱 부인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사실들이 바로 타락인간(墮落人間)을 구원하여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When the answers are made clear, it will not be possible to deny the existence of God, the Ruler who plans and guides history. We will recognize in every historical event traces of the Heart of God as He has struggled to save fallen human beings.

또 새 진리는 오늘날 문화권(文化圈) 형성의 세계적인 사명을 띠고 있는 기독교의 많은 난해(難解)한 문제들을 명백히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지성인들은 누구나 단순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의 구주(救主)라는 정도의 지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뜻을 체득(體得)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신학계(神學界)에서는 많은 논쟁을 벌여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과의 창조원리적인 관계를 밝혀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난해한 문제로 되어 있는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하여도 근본적인 해명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In addition, the new truth should be able to elucidate many difficult issues in Christianity, which has been granted the mission to establish its sphere of culture worldwide. Educated people are not fully satisfied with the simple assertion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and the Savior of humanity. They have carried on many theological debates in their efforts to understand the deeper significance of Christian doctrines. The new truth should elucidate the relationships between God, Jesus and human beings; they will be explained in light of the Principle of Creation. Furthermore, it should clarify the difficult mysteries surrounding the Holy Trinity.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救援)은 어찌하여 그 독생자(獨生子)로 하여금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피를 흘리게 하셔서만 가능하였던가 하는 것도 응당 풀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It should show why God’s salvation of humanity was possible only through shedding the blood of His only begotten Son on the cross.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인하여 분명히 구속(救贖)함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 이래 어느 한 사람도 구주의 속죄(贖罪)가 필요 없이 천국 갈 수 있는 죄 없는 자녀를 낳아 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중생(重生)한 후에도 여전히 원죄를 그 자녀들에게 유전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닐 것인가? 이러한 실증적인 사실로 보아, 십자가 대속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Still, difficult issues remain. Christians believe that salvation is given through the atonement of the cross. Yet no one has ever given birth to a child who is sinless and in no need of redemption by the Savior. This demonstrates that, even after their rebirth in Christ, people continue to pass down the original sin to their children. This raises a crucial question: What is the extent of redemption by the cross?

사실상 예수 이후 2천년 기독교 역사의 기간을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피로써 완전히 사죄(赦罪)함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신도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죄 없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를 이루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날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기독정신(基督精神)은 점점 쇠미(衰微)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일진대,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 온 바 십자가 대속(代贖)의 완전 속죄(贖罪)와, 그 결과적 사실의 불일치(不一致)에서 초래되는 모순을 무엇으로써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가 하는 것 등 우리를 궁지에 빠뜨리고 있는 난문제(難問題)들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대하고 있는 새 진리는 이에 대한 해답도 명백히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How many millions of Christians in the two-thousand-year history of Christianity have boasted that their sins were completely forgiven by virtue of the blood of the crucifixion? Yet in reality, a sinless individual, family or society has never appeared. Furthermore, the Christian spirit has been in gradual decline. How are we going to reconcile the discrepancy between the conventional belief in complete redemption through the crucifixion and the actual reality? These are only some of many dilemmas we face. The new truth, for which we long, should provide plain answers.

뿐만 아니라 이 진리는 예수님이 왜 재림(再臨)하셔야 하며, 또그의 재림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는 것과, 그때에 타락인간의 부활(復活)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서 하늘 땅이 불에 소멸되어 없어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 등, 상징과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성서의 허다한 난문제들을 이미 예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비사(比辭)로써가 아니고 누구나 공통하게 알 수 있도록 밝히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요 16 : 25). 이러한 진리로써만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는 성구(聖句)를 저마다 각양각이하게 해석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교파 분열의 필연성을 지양(止揚)하고, 그것들을 통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Many other difficult riddles are found in the Bible, couched in symbolism and metaphor, such as: Why must Jesus come again? When, where and how will his return take place? How will fallen people be resurrected at his coming? What is the meaning of the biblical prophecies that heaven and earth will be destroyed by fire and other calamities? The new truth should explain these puzzles, not in esoteric language but, as Jesus promised, in plain language that everyone can understand (John 16:25). Divergent interpretations of such symbolic and metaphorical Bible verses have inevitably led to the division of Christianity into denominations. Only with the aid of the new truth, with its clear explanations, can we bring about Christian unity.

이와 같이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이 최종적인 진리는 어떠한 경서(經書)나 문헌에 의한 종합적인 연구의 결과로나, 혹은 어떠한 인간의 두뇌에서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성서(聖書)에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계 10 : 11)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啓示)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아니 된다.

This ultimate life-giving truth, however, cannot be discovered through an exhaustive investigation of scriptures or scholarly texts; nor can it be invented by any human intellect. As is written in the Book of Revelation, “You must again prophesy about many peoples and nations and tongues and kings” (Rev. 10:11). This truth must appear as a revelation from God.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이 땅 위에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한 분을 보내셨으니, 그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文鮮明 先生)이시다. 이분은 수십 성상(星霜)을 두고 역사 이래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창망(滄茫)한 그 무형세계(無形世界)를 헤매시면서 하늘만이 기억하시는 진리 탐구의 피어린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최대의 시련의 길을 다 걷지 않고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최종적인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원리를 아셨기에, 선생은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영계(靈界)와 육계(肉界)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樂園)의 수많은 성현(聖賢)들과 자유로이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교(靈交)하는 가운데서 모든 천륜(天倫)의 비밀을 밝혀 내신 것이다.

With the fullness of time, God has sent one person to this earth to resolve the fundamental problems of human life and the universe. His name is Sun Myung Moon. For several decades he wandered through the spirit world so vast as to be beyond imagining. He trod a bloody path of suffering in search of the truth, passing through tribulations that God alone remembers. Since he understood that no one can find the ultimate truth to save humanity without first passing through the bitterest of trials, he fought alone against millions of devils, both in the spiritual and physical worlds, and triumphed over them all. Through intimate spiritual communion with God and by meeting with Jesus and many saints in Paradise, he brought to light all the secrets of Heaven.

문선명 선생

여기에 발표하는 말씀은 바로 그 진리(眞理)의 일부로서, 이것은 지금까지 그의 제자들이 듣고 본 범위의 것을 수록한 데 불과한 것이다. 때가 이르는 대로 더 깊은 진리의 부분이 계속 발표될 것으로 믿고 또 고대하는 바이다.

The words proclaimed on these pages are only a portion of this truth. This volume is merely a compilation of what his disciples have hitherto heard and seen. We believe and hope that when the time is ripe, more profound portions of the truth will be published.

어둠길을 헤매던 수많은 생명들이 세계 도처에서 이 새로운 진리의 빛을 받아 소생(蘇生)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 어서 속히 이 빛이 온 누리에 가득 차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In every corner of the world, countless souls who had been groping in the darkness are receiving the light of this new truth and are being reborn. As we witness this, we cannot stop shedding tears of deepest inspiration. We desire from the bottom of our hearts that its light quickly fills the earth.